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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디게아 교회터를 둘러본 뒤 대리석으로 잘 닦여진 길로 내려왔다. 이 길로 쭈욱 내려가면 골로새가 나온다.
골로새교회는 골로새서 4:12절에 따르면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진 교회로 알려져 있다. 그 교회는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주안에서 주종(主從)관계를 청산하고 하나됨을 실천했던 교회이다. 바울은 로마에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빌레몬에게 편지를 그리고 그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골로새 지역은 가보지 못했다.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리스도안에서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었던 교회,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선포하며 서로 섬겼던 교회 골로새 어찌보면 초기 한국교회와 많이 닮은 부분이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데로 금산교회 장로 조덕삼과 그의 머슴이었던 이자익목사의 이야기 말이다. 지금은 미담(美談)정도로 남아있는 것이 아쉽다. 기독교는 경계를 허무는 종교다. 넘을수 없는 경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지워내는 종교요. 극복할수 없는 경계, 높은 담을 무너뜨리는 종교이다. 라오디게아 교회터에서 순례팀은 버스를 타고 30여분 갔다. 멀리 하얀 천으로 덮은 것처럼 높은 산이 보인다. 산 정상 전체가 하얀 암반(巖盤)으로 둘러쌓여있다. 장관이다. 아름답기까지 한다. 여기가 그 유명한 파묵깔레(Pamukkale)이다.
파묵칼레는 ‘목화의 성’이라는 뜻이다. 경사면으로 흐르는 온천수가 만들어낸 지형물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석회성분을 다량 함유한 이곳의 온천수가 바위에 흐르면서 표면을 하얗게 만들었다. 온천수는 섭씨 35도로 질병의 치유의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치료와 휴식을 위해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관광도시였으며 많은 지역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국제도시였다. 지금은 온천수가 부족한 탓인지 TV나 사진에서 보는 것만큼 웅장하지는 않았다. 말라버린 물들이 파묵칼레의 명성이 예전 같지는 않은듯했다. 대학시절 터키를 여행했던 기억이 있는 아내도 시들어버린 파묵칼레의 모습에 당황했다.
순례팀은 일단 파묵칼레의 장관을 뒤로하고 히에라볼리로 향했다. 히에라볼리에는 파묵칼레의 언덕위에 세워진 고대 도시이다.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야외 극장이었다. 약 1만 5천명을 수용할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있다. 에베소의 야외극장보다는 작은 규모라는 말이 놀라울 정도로 그 규모는 웅장했다.
그리스식의 야외극장은 로마식의 야외극장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로마의 야외극장은 개방적이라기 보다는 공간형태이고 긴 타원형으로 되어있는데 비해 그리스의 것은 야외극장이라는 말그대로 주로 언덕위에 위치해있으며 야외에 그대로 개방되어 설계되었다. 부채꼴 모양으로 계단을 만들어 경사면을 가파르게 만들었으며 계단은 그대로 좌석으로 이용되었다. 무대에서 배우들이 소리를 내면 소리는 그대로 공기를 타고 올라가 위로 전달되는 형식이다. 제대로된 마이크 시설이 없었을 당시에 연설 과 배우들의 대사가 관객들에게 전달되기에 적절하게 건축되었다.
고대의 야외극장은 인간의 내면의 욕망을 발산하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정치가와 연설가들은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표출하였다. 연기자들은 이곳에서 옛 신화들을 공연함으로서 인간 내면과 신화 속의 회로애락들을 표출하였다. 그래서 고대 여러 도시들에는 반드시 야외극장이 있었다.
이 곳 히에라볼리에 1만5천명을 수용할수 있는 극장이 있었다는 것은, 이 도시가 문화와 예술 그리고 종교의 도시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오늘날 한국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있다. 교회의 건물은 사실 야외극장의 건축의 목적과 방향은 분명다르다. 그러나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인간 내면의 욕망을 표현한다. 인생의 희로애락들을 찬양과 기도를 통해 표출한다.
어떤 문학가들은 예배의 제의적 행사를 통해 카타르시스(Katharsis, 정화)가 표현된다고 한다. 인간이 가진 두려움과 불안함 인생의 문제앞에서 가지는 억눌림과 상함들을 예배를 통해 혹은 설교를 통해서 순화가 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말씀으로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승화(昇華)되는 것이다. 예배에는 그런 요소가 분명있다. 예배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인간은 치유를 받는다. 결단을 한다. 실존적 인간으로 거듭난다.
여러 이유로 교회는 일종의 극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치유와 정화의 장소로서 교회 그리고 예배 오늘날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과연 교회에서 일종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가?
교회는 우리네 삶에서 그 역할을 감당할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주고 있는가 말이다.
고대의 야외극장은 인간의 내면의 욕망을 발산하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정치가와 연설가들은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표출하였다. 연기자들은 이곳에서 옛 신화들을 공연함으로서 인간 내면과 신화 속의 회로애락들을 표출하였다. 그래서 고대 여러 도시들에는 반드시 야외극장이 있었다.
이 곳 히에라볼리에 1만5천명을 수용할수 있는 극장이 있었다는 것은, 이 도시가 문화와 예술 그리고 종교의 도시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오늘날 한국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있다. 교회의 건물은 사실 야외극장의 건축의 목적과 방향은 분명다르다. 그러나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인간 내면의 욕망을 표현한다. 인생의 희로애락들을 찬양과 기도를 통해 표출한다.
어떤 문학가들은 예배의 제의적 행사를 통해 카타르시스(Katharsis, 정화)가 표현된다고 한다. 인간이 가진 두려움과 불안함 인생의 문제앞에서 가지는 억눌림과 상함들을 예배를 통해 혹은 설교를 통해서 순화가 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말씀으로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승화(昇華)되는 것이다. 예배에는 그런 요소가 분명있다. 예배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인간은 치유를 받는다. 결단을 한다. 실존적 인간으로 거듭난다.
여러 이유로 교회는 일종의 극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치유와 정화의 장소로서 교회 그리고 예배 오늘날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과연 교회에서 일종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가?
교회는 우리네 삶에서 그 역할을 감당할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주고 있는가 말이다.
그의 순교기념교회 터는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교회터도 지진으로 인하여 심하게 훼손되었겠지만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하듯 산 중턱에 히에라볼리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교회는 언덕위에 있는 공동체다. 이 교회가 순교 기념교회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 순교는 곧 죽음이다. 죽음은 또한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순교를 기념하는 언덕위의 공동체는 그야말로 삶을 보여주는 공동체다. 예수믿는 자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어떤 영향을 미치며 살아야 하는지 말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5:14)'
히에라볼리에서 만난 언덕위에 있는 교회는 순교라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언덕을 내려와 수많은 돌관이 널려있는 히에라볼리 공동묘지를 지났다. 죽음은 또 다른 삶이다.
그런데 같은 죽음의 장소 이지만, 어떤 장소는 삶을 말해주고, 어떤 장소는 죽음 그 자체를 말해준다.
빌립의 순교 기념 교회 터는 우리에게 삶을 이야기해주고 공동묘지터 흉측하게 여기저기 깨진 돌관들은
우리에게 죽음 그 자체를 이야기한다.
내 삶은 무엇을 말해줄수 있을까? 순교 기념터에서는 삶의 결단을 느낀다. 그런데 깨진 돌관들 사이로 인생의 마지막과 허무를 느낀다. 그런데 분명 우리는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기에 실존적 인간인 우린 이 순간 결단을 한다. 죽음으로 끝맺는 삶을 살것인가? 다른 세상을 염원하며 소망하며 살것인가? 더나아가 죽음으로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것인가..
순례팀들은 그곳을 지나 다시 파묵칼레로 향했다. 우리는 하얀 목화성을 밟고 내려오는 경로를 선택했다. 따뜻한 온천물은 온갖 질병 온갖 피부병들을 깨끗하게 한다. 그런데 이 따뜻한 온천물이 흘러가 라오디게아에서는 미지근한 물이 된다. 계시록에서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
차든지 덥든지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다. 가장 자주 들은 해석은 열정의 차이로 해석을 해내는 것이다. 차가운 것은 냉랭한 열정을 말한다. 차가움 말이다. 그래서 과거의 성경의 해석자들은 차갑지 말고 미지근하지 말고 뜨거워라. 신앙에 있어서도 뜨거워야 한다. 라고 우리들에게 적용해준다.
그런데 최근의 해석들은 지명과 그 특성들을 통하여 영적 적용을 도출한다. 즉 골로새지역의 차가운 물은 많은 목마른 이들의 생수가 된다. 살아난다 회복된다. 그리고 히에라볼리에서 흐르는 뜨거운 온천물은 치유하는 물이 된다. 그러나 라오디게아로 흐르는 온천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지근한 물이되어 먹지 못하는 물이 될 뿐아니라 그 물을 먹으면 질병을 유도하고 구토증세를 동반했다. 그래서 성경의 해석자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에게 차든지 덥든지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열정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차든지 덥든지 하라.
그리스도인들을 찬물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목마름을 느끼며 갈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생명을 복돋아 주는 역할을 해야한다.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소개해야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따뜻한 온천수가 되어 치유의 역할을 해야한다. 오늘날 경제의 어려움은 질병을 동반한다. 경제의 어려움이 우울증과 답답함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경제의 어려움은 마땅히 받아야할 치료를 못받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경제의 어려움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에게 또다른 영적 기회이다. 따뜻한 온천수와 같은 역할을 해야한다.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데 나아가야 한다.
따뜻한 온천수에 발을 담그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고민해 본다.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나는 목마르고 답답한 이들에게 생수가 되고 있는가? 치유가 필요한 이들에게 치유의 능력이 되고 있는가.. 빌립 순교 기념교회를 통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순교적 삶을 통해 내 삶을 반추해 본다.
하얀 파묵칼레의 석회 암반을 걸어 내려오면서 정화를 꿈꾸고 더 나은 삶을 결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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