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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신뢰의 길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9.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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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목사님, 치열하게 살아야합니다. “
“네 그렇지요 장로님.”
바쁜 주일 교회 장로님과 모처럼 시간이 되어 과자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사가 치열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함신주

 '목사가 치열하게 산다는 게 무엇일까.'

얼마전 모 집사님께서 종교개혁 500주년 그리고 선교에 대한 한국교회의 비판에 대한 글을 전해주셨다.
물론 통찰이 있었다.
그런데 아쉬운 부분이 보였다. 한국교회의 종교개혁의 과제라고 내어주신 대안이.....

목회자들의 사례금을 공개하라.
그리고 출신 학교를 공개하라 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떤학교에서 공부했는지가 성도들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례금의 공개는 재정의 투명성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성도들이 원하는 목회자상은 무엇일까? 

사례금 을 공개하고 출신학교를 공개하면 진정 우리의 목회자임이 확증되는 것일까?

예전에 일반 대학에 비해 신학대학교의 지적 수준이 낮다고 평가하시는 집사님의 날카로운 비판을 들은적이 있다. 그리고 수 년 전 청년 사역할때 나는 똑똑한 모 청년에게 목회자가 과학과 인문학의 소양을 기르기 위한 책목록도 받은적이 있다.

치열하게 사는 것은 좋다.
내가 아는한 좋은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 삶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그렇게 살도록한다. 

소명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위 무언가를 위해 치열하게 사는 것은 좀 다른 의미다.

목회자가 치열하게 사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때문일까? 치열하게 공부해서 좋은 학교를 나와서 살아야할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시간을 줄이고 공부하며 좋은 지적 소양을 깆추고 살아야할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소위 오늘날 우리의 사회를 뒤흔드는 갑질 논란이 있다.
좀더 살펴봐야 할일이지만, 나는 갑질의 근본배경은 우리 한국 근대의 믿음의 선배들이며 계몽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유길준(1856-1914) 윤치호(1865-1945) 서재필(1863-1951) 으로 이어지는 사회진화론[각주:1]자들의 입신양명론이 고스란이 이승만에게 이어졌고 단단히 뿌리내린채 오늘의 한국 현대인들의 정서에 이르게 되었다. 

사회진화론은 대체로 1880년대 초에 일본유학파와 애국계몽운동사상가들을 통해서 1900년대에 자리잡았다. 서구제국주의 열강들과 일본의 제국침략이 거세게 몰아치던 시기였다. 이런시기속에 계몽운동가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한 정신력의 무장과 지적계몽의 의식이 고조되어 이런 분위기 속에 구한말 사회진화론이 수용되었다. 

유길준은 그의 서유견문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역시 중요한 것은 천하의 각 사람이 경쟁하는 정신의 강약에 있으며 높고 비천함이 있다는 연고이다. ...그 기력을 왕성히 하여 경쟁의 안목을 원대하게 하고 위아래 마음을 같이 하여 경쟁정신을 활발하게 하고. ."[각주:2]

경쟁정신을 활발하게 할것을 강조하고 있고, 이런 정신이 부국강병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윤치호 같은 이들은 서구의 문명세계를 모델로 삼아 강한 민족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입신양명을 위해서는 국민개조론과 같은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다시말하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배워라. '

사회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배우고 강한 군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철저히 민족과 국가를 생존단위로 보고 있으며, 경쟁의 승리와 생존을 위해 강한 정신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진화론의 뿌리는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있다.  강준만교수는 대한민국은 갑질 공화국이라고 까지 말한다.  '성공하고 싶으냐? 그러면 공부해라. 치열하게 살아라.  경쟁사회에서 이기려면 강해져야 한다. '우승열패의 원리에서 살길은 갱존경쟁에서의 승리뿐이다'[각주:3]   

이런 사회의 내부엔 절망과 좌절 깊은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다. 뿌리깊은 수저론이 내재되어 있을 뿐아니라 창문을 뚫을수 없는 현실에 비애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교회에도 예외가 아닌것이다.  목회에 성공하려면 치열하게 살아야한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성도들의 의식을 개조해야한다는 생각들 말이다. 그래서 저마다 목회자들은 학위에 집착한다. 치열하게 살아간다. 성도들은 그런 목회자들에게 출신학교의 공개와 그들이 받는 사례금의 공개를 고작 종교개혁이라고 까지 이야기한다. 목회자들의 지적 소양이 한국교회를 발전시키는 기준으로 여긴다. 좋은 설교가가 한국교회의 부흥의 전략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잘되려면 치열하게 배우고 치열하게 사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는 점점 하나님나라의 능력이 인간의 치열함과 그 능력에 파뭍혀져 가고 있는 것같다. 이글을 쓰는 필자도 어떻게 하면 좋은 교회에 담임을 나갈수 있을지.....경쟁에서 이기려면 학위를 받아야 하는가...... 교회가 세상과 더불어 강해지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 교회는 점점 열등감과 절망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하나님나라는 루아흐의 공간이다. 이는 세상적 가치관이 들어올수 없는 공간이다. 경쟁과 이기심,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사는 공간이 아니다.하나님의 창조의 공간이다. 예배드리는 공간이다. 우리가 다같이 살아야 하는 공간이다. 진정한 숨쉼의 공간이다. 목회자는 그 공간을 이뤄가는 사람들이다. 예배드리는 자들이며 중보자적 사명을 완수하는 사람들이다. 예배드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자들이며, 하나님과 사람들을 이어주는 것이 중보자적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나라를 위해서....그러나 또 치열하게 살아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우리는 치열하게 사는  세상속에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나라를 품으라고 말이다. 바울도 천국에 시민권을 가진 자라는 정체성을 견고하게 가졌다. 세상에서 사는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치열하게 사는 것과 세상의 방식은 분명 다르다. 그런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사느냐를 놓고 보면 치열하게 사는 삶과 세상의 방식은 또한 다르지 않다.  

무엇을 위해서 과학과 인문학의 소양을 기르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할까? 무엇을 위해서 목회자의 학력을 공개하고 무엇을 위해서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준비해야할까? 

목회자들은 하늘의 부름을 받은 성직이다. 목회자가 설교를 잘하고 목회를 잘하기 위한 것은 오직 한 비밀을 위해서이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교사인 사촌형님도 그 비밀을 위해서 척박한 땅으로 갔다. 내가 존경하는 많은 목사님들도 이 비밀을 위해서 영혼을 섬기고 낮아지시고 사랑하셨다. 치열하게 그것을 위해서 사셨다. 

그 비밀은 절대로 우리에게 높은 곳이 명예요 저급한 양적 성장논리라고 말한적이 없다. 높은 곳은 오직 하나님계신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비밀은 우리로 그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발빠르게 치열하게 빨리 오르라고 명한적이 없다. 그것을 위해서 과정을 무시하는 방식이 이 땅을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한 영혼을 위해서 라면 시간이 많이 든다 할지라도 가야하고 사마리아 땅도 내질러 가고 거라사도 가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 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2:24~29)

  

예수그리스도가 우리가 전해야할 비밀이시다. 비밀은 치열한 삶을 통해서 터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임재와 주시는 영감으로 가능하다. 성령은 돈으로 받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사도행전 19장 스게와와 일곱아들을 통해서 우리는 잘알고 있다. 말의 지혜와 능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린도전서 1장을 통해서 깨닫는다. 비밀은 오직 성령의 임재와 주시는 영감으로 가능하다. 이것은 치열한 몸부림 속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끊임없는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서 가능하다. 단 일회적인 것도 아니요 반복적이며 아주 느린 방식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위한 삶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니 교회는 이제 그것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치열하게 사는 법이아니라 빠르게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게 아니라 느리더라도 다소 답답하더라도 올바르게 가는 방법말이다. 특히 목사들에게 학위가 성공의 길을 보장해준다거나 사례금이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이 하나님나라의 방식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보장해주고 하나님께 받을 면류관이야 말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 그것을 가르쳐줘야 하지 않을까.  

 

 

   

 

 

 

 

 

  1.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은19세기 찰스 다윈이 발표한 생물진화론에 입각하여, 사회의 변화와 모습을 해석하려는 견해로 허버트 스펜서가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D%9A%8C%EC%A7%84%ED%99%94%EB%A1%A0 [본문으로]
  2. 유길준, 1971. [본문으로]
  3. 우남숙, "애국 계몽운동기의 사회진화론 연구 - 장지연 , 박은식을 중심으로 -"역사와 사회 7권0호, 1992년 01월,107-120(14page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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