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간절한 기대 (삶)/신뢰의 길

하나님의 인자하심@ 여수 갤러리안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9. 6. 23.
728x90
반응형

인자仁慈 하심.

수요예배 담임목사님의 설교에 은혜가 있었다.
시편 118편 "하나님은 내편이시라"
설교를 들으며 계속 반복되는 어구인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에 집중해보았다.
인자하심... 성경에 하나님을 인자하신 분으로 많이 묘사한다.
인자하심이 뭘까? 인자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여러가지인듯 하다.

영어버전 특히 NIV 에서는 Give thanks to the LORD, for he is good; his love endures forever.
NASB 에서는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도 메세지(Massage)에서 인자하심을 His Love never Quits. 라고 번역하였다.

레슬리 알렌( LESLIE C. ALLEN)은 그의 WBC시편주석에서 "헤세드(“인자")는 여기서 구원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고 밝힌다.
인자하심에 대해 예레미야 애가를 주석한 두안 가렛(DUANE GARRET)은
"(인자 - 헤세드)는 ‘신실한 이스라엘의 백성들,그리고 일반 적으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성향과 은혜로운 행위를 묘사한다" (NIDOTTE, 2:211). (중략)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에게로 돌이켜 순종한다변, 주님이 긍흉 (베리하메카)을 베푸시고 언약적 관계만이 아니라 이 땅도 회복케 하실 것 임을 약속하신다."

위의 몇가지 근거로 인자하심 이란, 하나님의 사랑... 더나아가면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사랑을 말한다.
근데 본 시편에서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끝이 없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인자의 영원하심과 끝없으심에 대한 오해도 많이 있다. 얼마전 이슈였던 랍 벨(Rab Bell)의 사랑이 이긴다(Love Wins) 라는 책은 보편구원론적(Universalism)인 늬앙스를 주었으나, 이 책의 작은 기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협소한 생각을 넓혀주었다.
"지금까지 살았던 수십억의 사람들 중에 선택된 몇 명만이 ‘더 나은 곳으로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영원한 고통과 형벌 속에서 괴로워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돼도 하나님은 괜찮단 말인가? 하나님은 영원히 고통당할 수많은 사람들을 수십만 년에 걸쳐서 창조하셨단 말인가? 그렇게 하시고도, 아니 그것을 허용하시고도, 여전히 자신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실 수 있단 말인가?"(랍벨, 사랑이 이긴다, pp.29~30.)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이 영원하신 하나님 맞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성이 결국 지옥을 텅빈 곳으로 만들어 놓는다거나 
휴머니즘으로 그 가치가 전락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존 맥아더(John Macarthur) 같은 보수적인 설교자 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와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한다.
"인애가 곁들어진 이 거룩한 증오는 하나님에게 어떤 모순이나 애매모호함이 있음을 듯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진노는 그분 본성을 반영합니다.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거룩하십니다. 긍휼히 여기시지만 악을 차마 못보시는 분이십니다. (존 맥아더, 하나님의 사랑,132)"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진노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 둘의 성품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 맥아더는 '인애가 곁들어진 거룩한 증오'라고 한다. 멋진말이면서도 납득이 간다.
사실 인간에게 모순된다고 여기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인애가 곁들여진 거룩한 증오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증오는 모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는 절정이다.
또 너무 장황해졌다.^^;;

최근 심방중에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서 마음에 와닿는 일이 있었다. 한 집사님과의 대화에서 였다. 이 집사님은 작년 큰 교통사고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신 적이 있었다. 필자도 몇번을 응급실로 다니며 기도해드렸고 그때마다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였다. 지면상 그 간에 있었던 은혜의 시간들은 뒤로하고..
얼마전에 그 집사님댁을 심방하면서 식사하러 가는 차안에서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목사님 저는 얼마나 교만했는지....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시지 않으면 하나님 손해라고 생각했어요...."
" 그랬군요..."
맞는 말씀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뭔가를 안하시면 하나님께 너무 당돌해진다. 하나님 이렇게 나오시면.... 당신 손해라고...^^ 그런데 하나님은 손해보지 않으신다. 어쩌면 그 사실을 아는 삶이 은혜의 삶이 아닌가 싶다.
집사님께서 계속 말씀을 이어가셨다..
"목사님, 근데 하나님은 손해보시지 않더라구요. 내가 교만했더라구요.... 하여간 이렇게 살려주신 은혜를 되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하루하루를 살도록 하시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오..... 그게 뭔가요?"
"목사님..... 하나님이 우리로 생명을 연장하시고 오늘 눈을 뜨게 하시는 건... 다른게 아니라 회개하라고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로 눈을 뜨게 하시고 삶을 연장시켜 주신것은..... 다름아니라 우리로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자 하심이다..
때때로 죽음의 곳 근접까지 가는 경험은 우리로 인생이 선물이요 기회라는 것을 아는 법이다. 이것을 굳이 신학적으로 따질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한 개인의 신앙이라고 지나칠수도 없다. 시편의 고백 역시 신학으로도, 개인의 신앙이라고도 치부해버릴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사님의 고백을 들으며 마음 한구석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무엇일까? 예레미야애가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 내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로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애3:22~26)
우리를 향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무궁하신 이유를 우리가 진멸되지 않음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사건을 지나치지 않고 아침마다 눈을 뜰때마다 그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작고 소소한 일상을 영위하게 하신 것을 감사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로 아침마다 눈을 뜨게 하시는 그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다는 의미 아닐까?
하나님의 성실과 인자, 긍휼의 성품은 인생들을 향한 구원하심과 분명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다는 의미 아닐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하루의 삶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애를 실현하며 구원하심을 바라며 살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면, 우리의 인생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요. 은혜로 주어진 오늘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된다.
더욱이 하나님의 성실하심, 즉 인생을 향하신 구원의 계획과 거룩한 실천이야 말로 가장 큰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루하루 인생의 모든 여정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맡기며 살아간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라고 하는 고백의 절정으로 나아간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그의 (Religious Affections ,신앙과 정서)에서
"성도들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은혜와 선함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성도들은 보편적으로 그 모든 은혜와 선함을 위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중략)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셔서 영혼의 기능과 연합하게 하시고 본성의 원리의 방식을 따라 거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영혼은 은혜로운 옷 입힘을 받을 때 새로운 본성으로 옷입혀지고 새로운 성품이 상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모든 작용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424-5)"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인 인자하심은 인간편에서는 전적인 은혜이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죄인을 향한 '인애가 곁들여진 하나님의 거룩한 증오'와도 연결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회는 어떤 이들에겐 좋은 것이지만, 어떤이들에겐 가중처벌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오늘하루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묵상한다. 내게 기회로 주신 하루를 어찌 살아야할지를 고민하며, 구원의 방편으로 주신 은혜를 잘 누리고 살아야 겠다.

여수의 갤러리안 카페 @함신주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