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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복음주의'란?

복음주의 5- 알리스터 맥그래스

by 그 길을 2011.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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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적 영성의 추구

영성은 가장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기독교 사상과 실천분야들 중 하나이다. 영성은 특별히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많은 관찰자들에게 뉴 에이지 운동은 현대문화의 영적인 빈약함과 조야함에 대한 하나의 반작용으로 보여진다. 삶에 있어서 영적인 요소에 대한 진정한 갈망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때로는 사람들을 기독교로 향하게 하였던 만큼이나 사람들을 기독교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여 왔다.

영성 복음전도, 그리고 성장

앞에서 나는 복음주의가 기독교의 현대화된 모든 해석들 가운데 실제적으로 유일하게 개인들을 세속문화로부터 신앙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복음으로 사람들을 얻고 난 이후 복음주의는 그들을 유지할 능력이 있는가? 이제 나는 복음주의 내부에서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심각한 우려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영성이라는 말의 이해

영성은 우리 시대에 자주 회자되는 단어들 중 하나가 되었고 많은 복음주의자들에 의하여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보건대 그 용어는 매우 문제가 될 수 있는 연관들과 의심스러운 역사적 기원을 담고 있다. 시작부터 그 용어는 "순전히 영적인 것을 향한 분투" 혹은 "물질세계에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거부"와 같은 개념과 강한 연관성을 지녔다. 물질 세계에 대한 부정적 태도의 발전을 한탄한 17세기 프랑스 저술가들은 귀용 부인의 새로운(nouvelle) 영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비난을 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상당 부분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신 플라톤적 기초에 근거하여 기독교적 삶을 순전히 신비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영성이란 단어는 우선적으로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영혼과 육체, 명상과 일상생활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과 관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성은 자신의 주제가 주로 일상적 삶의 산만함으로부터 떠남으로써 취해지는 영혼의 내면적 양육임을 암시한다. 한편 개신교 전통에서 그 오래된 어휘는 좀더 믿을만하게도 영성의 중심적 국면, 즉 신앙과 일상적 삶의 전적인 통합을 반영한다.

복음주의는 영성을 중심한 문제들의 이러한 상호 관련성에 대하여 전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못함으로써 현대교회를 실패케 하였다. 복음주의는 영성에 대한 자신만의 뚜렷한 접근법이 살아있고 신뢰할만하고 이용 가능한 것으로 남아있다는 분명한 확신을 심어줄 의무를 교회에 빚지고 있다. 복음주의가 전반적으로 교회들이 활용할 수 있는 그들 자신만의 뚜렷한 헌신을 하지 못한 채 다른 전통들의 영적인 부를 이용하기까지 기생적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복음주의는 그들 자신의 유산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은 고사하고 너무나 자주 자신들의 유산을 보지 못할 뿐더러 그것 자체를 식별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현대 교회는 당연히 존재해야만 하는 자원 즉, 근본적으로 그리고 일관되게 성경에 근거하고 십자가에 정향된 영성에 대한 접근을 봉쇄당하고 있다. 현대 복음주의는 이러한 종류의 영성이 오늘날의 교회에서 생존 가능한 선택으로 남아있다고 확신시켜줄 의무를 지닌다.

복음주의 영성의 모범적 역할

복음주의 미래에 대한 어떤 장기간의 위협이 있다면 그것은 영성에 대하여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의 뿌리와 전망에 있어서 철저히 복음주의적인 영성의 형태들을 개발하거나 재발견할 수 없다면 오늘의 복음주의자들은 내일에는 탈 복음주의자들이 되어있을지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긴급한 과업들 중의 하나이다. 복음주의 영성을 증진하기 위한 어떤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복음주의 운동의 현 성장 추세는 오랜 기간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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