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의 상실? 복음주의 확장과 정체성의 위기
1950년 이후 복음주의는 계속 확장되어 그 영향력을 강화해 왔고, 의심할 나위 없이 현재도 이런 확장은 끝나지 않았다. 실로 복음전도나 목회 사역을 위한 복음적인 위원회 같은 다양한 기구들이 계속 성장해 왔다. 그러나 그런 확장과 더불어 어려움도 있었다. 수적인 성장은 그만큼 부풀림도 많거니와 비전이 상실되는 위험에 노출되기도 하였다.
복음주의의 확장
앤더버 뉴튼 신학교(Andover Newton School of Theology)의 가브리엘 팩커(Gabriel Fackre)는 현대 미국 복음주의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고 업져버의 자격을 가지고도 있는데, 그는 "오늘의 복음주의는 분열 없는 제국이 아니다"는 말을 했다. 그는 복음주의 진영에 적어도 다음과 같은 6개의 다양한 흐름이 있다고 본다
다양성이란, 그것이 강조되어야 하는데, 물건들이 조각이 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의미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집중된 또는 공유된 관심사들의 결핍은 당파주의(factionalism)로 흐를 위험은 실제로 존재한다. 특별히 교리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명백히 줄어드는 추세는 그 운동의 중심성이 모호하게 될 수 있는 심각한 위험이 있다.
정체성과 상황
일치와 확실한 공동의 동질성을 과거에 수립된 복음주의 전통들을 확고하게 붙잡음으로써만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유혹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놓는 위험이 있다. 성경의 빛 안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 복음주의 본질의 중요한 부분이다. 어제의 복음주의자들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신학의 과제는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말씀해 오신 바가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시대에 친숙한 개념들로 옷입히는 것이다. 성경은 그 변화하는 문화적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비 상황화(de-contextualized)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우리 시대의 인식상의 가정들과 사회적 유형들에 맞물릴 수 있기 위하여 재 상황화(re-contextualized)할 필요가 있다. 채용된 접근 방식은 고전적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 성경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는 것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해석과 적용 양자는 복음주의 안에서 차이를 낳아 왔다. 상황이 변하고 있을 때, 복음 선포는 그 상황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복음에도 변함없이 적용된다. 복음이 그 상황에서 특수화된다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것은 전도사나 설교가나 신학자들에게 위임된 것이다. 어제의 복음의 특수성 모두가 또한 가끔 오늘의 복음의 곤혹이 된다는 것은 역사의 명백한 사실이다. 1950년대 초기로 돌아가면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이슈였다. 50년을 역사의 길에서 더 내려가 그들은 다른 세계에 속한 것처럼 보인다. 어제의 이념을 우직하게 반복하는 것은 오늘의 사람들을 복음으로부터 소외시킬 수 있다. 복음이 소외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특별한 제시(presentation)가 입으로부터, 시대로부터 그리고 장소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진보는 적응을 수반한다. 그러나 적응은 변화를 수반할 필요가 없다.
정체성의 위기
복음주의 역사에서 다른 개인들과 운동들은, 특별히 청교도들과 웨슬리 형제들은 집중적인 연구를 할 만한 가치가 있다. 가족사에 대한 점증하는 복음주의의 인식은 그 운동의 역사적 위치와 근거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수단들이다. 마찬가지로 신학적, 목회적, 영적 자원에 대한 접근은 교회들의 계속되는 연속성을 보여줄 수 있다. 복음주의가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가족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강조될 필요는 없다. 그 유산의 재발견은 그 운동의 장기적인 미래에 매우 중요하다. 이제 나는 현대 복음주의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도전들 중에 분명한 하나, 즉 뚜렷이 복음적인 영성에 대한 물음의 연속성을 드러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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