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의 새로운 부흥
복음주의가 세계 기독교의 주요한 구성원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중요성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인식이 그 운동의 기원과 성격, 특징 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동반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복음주의 운동 내에서조차 복음주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장점과 약점에 대한 인식이 크게 부족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 운동의 대체적인 윤곽을 잡고, 그것의 놀라운 매력과 어두운 면을 함께 이해함으로써 복음주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계보와 역사를 안다는 것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의 계보와 역사를 알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과거 복음주의가 겪었던 그 승리와 패배에 대해 잘알지 못한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을 예비해 주었던 가라성 같은 저술가, 사상가, 설교자, 목회자, 또 일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알지 못한 다. 그 역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1920년대와 1930년대 복음주의운동을 거의 멸절시킬뻔 했던 근본주의 논쟁과 같은 과거의 실수를 쉽게 되풀이하게 된다. 복음주의가 서구 교회와 전세계를 통해 더욱 확장됨에 따라, 돌이킬수 없는 퇴락으로 이끌어 갈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계보와 역사는 배우고 아는 것은 단순히 실수를 막자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복음주의의 매력을 더 잘이해하기 해주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주의가 어떻게 그런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게 되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많은 젊은 복음주의 자들은 세계 기독교내에서 복음주의가 주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단지 복음주의가 복음주의가 항상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계보와 역사를 배우고 아는 것은 기독교의 미래에 있어서 확고한 위치를 지속적으로 누리도록 하는 한가지 길이다.
복음주의의 역사적 기원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였다. 그것은 중세 말기 교회의 형식적 신앙에 반기를 들고 성서적 신앙 회복을 주창했던 가톨릭 저술가들을 가리키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 개인적 구원의 경험을 강조하는 복음적 태도는 이미 15세기 후반 이태리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그리고 그것을 중시하는 영적 운동은 1520년대 이태리 귀족사회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복음주의 운동의 초기 형태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복음주의는 루터교적이며 반(反)가톨릭 교회적인 것을 의미했다. 독일에서 그것은 프로테스탄트들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16세기 중엽, 가톨릭교회는 루터교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칭의의 교리에 근거하여 개인적 신앙과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는 루터의 복음주의적 신앙태도를 정죄하고 금지했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는 반 가톨릭교회적 루터교인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로마 가톨릭교회는 복음주의자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불렀으며, 17세기 중엽 그것이 일반화되고, 복음주의자와 프로테스탄트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복음주의 규범적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편, 복음주의를 신학으로 본다면, 서방 기독교, 종교개혁신학,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의 맥을 계승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운동으로 본다면, 그것은 교회사에 나타난 여러 주요 운동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 종교개혁,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부흥운동 등이다.
복음주의의 원천
복음주의의 첫번째 역사적 원천은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은 복음의 본질을 재천명한 복음주의 운동이다. 종교개혁 시대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복음에 대한 루터의 신앙을 강조하며 자신들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복음주의적(evangelisch)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그렇지만 루터가 복음주의란 말을 사용했다는 것이 종교개혁과 현대 복음주의와의 특별한 관계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프로테스탄트와 동의어로 사용된 것이며,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은 복음주의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과 복음주의 관계는 그런 외형적인 것이 아닌, 내면적인 것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의 중심 주제들이 복음주의 운동의 근원과 근간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종교개혁의 표어,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총(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의 원리가 복음주의 정체성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종교개혁은 복음주의의 초점과 표준이 되었다.
현대 복음주의의 두번째 역사적 원천은 17세기 청교도 운동이다.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은 청교도운동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며, 복음주의자들 역시 청교도들의 후예들이다. 웨슬레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서적목록에 많은 청교도 작가들의 저작들을 포함시켰다. 청교도운동은 영국교회 갱신운동이었다.
복음주의가 신앙의 체험적 측면을 강조하며, 그것이 그 중요한 특징이 된 것은 청교도운동의 영향이었다. 또한 청교도운동은 복음주의에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확신과 기독교 국가 건설의 환상을 제시했다.
복음주의의 세번째 원천은 경건주의 운동이다. 독일 경건주의는 사상의 체계라기보다 감정의 체계이며 신학적 분위기와 종교적 부흥운동이다. 경건주의는 기독교란 신념의 체계일뿐만 아니라 일종의 삶이라는 진리를 재발견하며, 형식화된 정통주의 기독교에 활기를 불어넣는데 공헌했다. 그것은 생명력 있는 개인적 종교에 대한 욕구를 육성했다. 독일에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은 18세기 영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복음주의가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는 것은 경건주의 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부흥 및 각성운동의 특징은 회심 체험, 경건하고 성결한 삶, 교회갱신, 노예제도 폐지와 인권향상 등 사회개혁, 봉사와 선교 등을 강조한 것이다.
복음주의의 문화적 상황
그러나 이세가지 흐름이 합류하여 현대 복음주의에서 한가지 큰흐름이 형성하긴 하였지만 그들의 혼합이 다양한 소용돌이와 격류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근본주의는 현대 세계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있고 혐오받는 운동들 중하나이다. 1910년 미국의 한 소규모 출판사는 근본주의라는 제목의 12권으로 된 연재물중 첫 번째 책을 출간하였다. 일련의 역사적 사건을 거쳐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이연재물로 부터 그 이름을 따오게 되었다. 근본주의는 미국내에서 세속적인 문화의 성장에 대한 종교적 반작용으로 등장하였다 원래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특히 1920~1940년 사이에 미국의 개신교권내의 한운도을 가리키는 말로 쓰여졌다. 처음에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현대우리가 연상하는 정치적 급진주의. 반지성주의 혹은 반계몽주의의 의미를 담도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얼마안가서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미국 복음주의의 대중적 등장
19세기 초 미국 복음주의의 특징은 부흥운동을 발전시킨 것과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통해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한 것이다. 부흥운동과 국교분리의 결합은 미국 교회에 활력을 가져다 준 반면, 실용성에 대한 관심이 원리에 대한 관심을 압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진리의 문제를 실용의 문제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대 각성운동은 복음주의를 19세기 미국 교회의 지배 세력으로 부각시켰으나, 동시에 개인적 종교 경험과 지성적 엄격성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긴장을 일으켰다.
현대 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및 부흥운동의 산물이다. 이 운동들은 복음주의에 근본 토대와 기반을 형성했다. 한편 복음주의 운동은 현대 초기에 태어나 20세기 중엽 성숙에 이르렀다. 복음주의는 과학적 사고, 경험적 접근 및 상식주의에 같은 현대의 도구를 항상 사용하고 있다.
전후 영국의 복음주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복음주의는 영국국 교회내에서 멸시 받는 소수집단에 불과하였다. 덜함(Durham)의 주교 헨슬리 헨슨(Hensley hencen 1863- 1947년)은 복음주의 운동은 “80대 노인이 이끄는 무식쟁이들의 군대”라고 비웃었다. 몇가지 좋은점을 제외하고는 그 운동은 분리주의적 성향과 반지성적인 수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문화나 학문적 연구 신앙의 근거에 대한 합리적 탐구가 필요없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했으며, 그들의 생각과 지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이점은 그들의 분리주의적 태도에서 잘 나타나고있다”. 복음주의 운동의 고립과 수적인 여세는 복음주의 운동내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외의 상대적인 문제에서까지도 획일성을 추구하는 불건전한 열성을 초래하였고 이에 따라 복음주의 노선을 이탈한 사람들은 배신자나 타협꾼으로 낙인찍히기도 하였다
비록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 운동은성경의 진리는 반드시 종교개혁이나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이 물려준 언어로써만 표현되어야 하며, 복음주의자들이 이미 알고있는 것외에는 성경에서 더 배울것이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195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상황은 급격히 변화 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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