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상황지 2017년 2월호 "사회적 영성 : 네 이웃은 누구인가" 라는 커버스토리의 글들을 보고 있다가 생각이 드는 몇가지가 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다. 일단은 기독교인으로서 개신교 목회자 이다.
영성의 중요성을 깊이 알고 있을 뿐아니라, 현실세계 좀더 구체적으로 일상에서 영적인 삶을 유지하고 견고하게 하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특별히 행동하는 영성의 중요성, 사회적 의미의 영성은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세월호 인양을 위한 미수습가족들의 이야기가 마음을 찌른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행동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더없이 내 자신을 부끄럽게하고, 죄책감을 갖게한다.
골방에서 기도만 하지 말고 현장으로 나오고 광장으로 나오라는 일침이 더없이 송곳으로 찌르듯이 아픔이 느껴진다.
2016년 10월 29일 토요일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광화문집회를 앞두고
모교수가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기셨다.
"우리교회 목사님이 삯군목사인지 선한목자인지 구별하는 법
내일 예배설교때 박근혜와 시국에 대해 뭐라하는지 잘 들어보면 됨." 1
주일을 준비하는 목사인 나역시도 긴장이 될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만약에 내가 담임목사라면, 내일 주일 설교를 어떻게 해야할까....
답답함이 느껴졌다. 순간 마음에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내가 그럼 선한 목자일까?
나는 사실 삯을 받고 목회를 하는 삯군목자다. 그리고 주님만이 선한 목자 이시다.
10월 30일 주일 나는 여느때와 같이 주일 예배를 드렸으며, 사무실로 찾아오는 성도님들을 맞아 기도해드리며,
상담하고 격려하고 기도해드렸다. 그 주간에는 심방하고 심지어 장례와 위로의 시간을 가졌다.
이런 내 목회에 그저 광장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부끄러워 해야할 것인가..
광장으로 늘 나가시는 교수님께는 이런 삶을 부끄럽다 하겠지만....
그렇다면, 사분오열된 정치와 사회 기독교는 무엇을 외쳐야 할까....
나는 광장에 나왔고 너는 골방에 있으니 나는 당당하고 너는 부끄럽다를 외쳐야할까.
물론 우리안에 사회에 대한 의식 행동하지 않은 신앙에 대해서
일침을 가하는 메세지가 필요한 세상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삯군과 선한 목자를 누구는 광장으로 가고, 사회 문제를 강당에서 선포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싶다.
비슷한 시기에 10월 27일 유기성목사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대통령 탄핵을 위한 사회적 움직임에
"주님만 바라보자" 라는 글을 올린 데에 많은 사람들이 분개하였다.
말하자면, 이런 시대속에서 어떻게 기도만 하라는 것이냐 라는 질문들이었다.
아래는 유목사에 대한 2016.10.28 자 뉴스엔조이의 기사글이다.
한 네티즌은 "우상숭배 그렇게 싫어하는 하나님이신 줄 알면서 왜 현 정부 무당 정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하는 교회인가? 정말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글을 남겼다. 다른 네티즌은 "가만히 기도하면 주님께서 대통령 마음을 움직이시는가?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 판을 엎으시기도 했다"며 기도뿐 아니라 행동도 해야 한다. 2
행동하는 신앙, 광장의 영성 분명 좋다. 나는 한 청년이 광장으로 나아가야 하냐고 묻길래 당연하게 대답했다.
'광장으로 가라고, 그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위의 평가가 정말 옳은 평가일까?
영성은 개인적 차원으로 시작되어 공동체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개인의 영성의 무기력이 어떻게 풍성한 공동체적 영성을 향유할수 있으며
탈진된 공동체적 영성이 어떻게 풍성한 개인의 영성으로 나아갈수 있을까? 분명한건 영성은 개인과 공동체적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과 공동체 중 무엇이 먼저인가 를 굳이 따져묻는다면,
개인의 영성의 풍성함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한 개인이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로 서야 영적 공동체를 세울수 있다.
한 개인이 자유와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해서 바르게 인식하고 행동할때에 이 사회는 더욱 건강해 질수 있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골방의 기도를 부질없는 것이다.' 라고 보고싶지 않다.
설교자로서 최선을 다해 설교를 준비하되, 그것이 어쩌면 사회문제에 대해서 일절언급하지 않지만,
그래도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에 영적인 건강함과 고민들을 말씀앞에서 씨름하게 만들어주며,
하나님앞에서 정직하게 살도록 돕는것에 대해서 삯군이라고 평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선한목자이신 하나님앞에 갈때에 하나님께서 평가해 주시는 것이지,
누군가가 광장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누군가 설교단에서 사회적 이슈를 선포하는 것을 보면서 선한목자다. 라고 평가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시 복음과 상황지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특별히 오준규 목사(낮은마음교회)의 글을 본다.
"기도는 기도하는 장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개인을 위한 것이든 타인을 위한 것이든 세상을 위한 것이든, 우리는 언제나 골방에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골방에서만 기도해서는 안된다. 그 상황과 현장을 벗어난 기도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일수 밖에 없다."
"광장에 나가보라 광장에서 절박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와 골방의 기도가 같을수는 없다.....기도하는 신앙인은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한다." 3
무엇보다 오목사는 골방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너머 광장으로 나아가라고 전해주고 있다.
기도만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광장에서의 절박함, 분노, 쓸라림들을 느끼며 기도하는 것은 분명다르다.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다..... 깊이 공감도 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덧붙여 말하고 싶다.
"골방에서만 기도해서는 안된다.
분명 광장에서 절박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와 골방의 기도는 같을수 없다.
그러나 들으시는 분은 같다.
한번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은,
골방의 기도를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또한 광장의 기도를 무모하다고 여기지말기를 바란다."
만약에 위의 말에 누군가가 삯군목자냐고 물으신다면,
네... 저는 교회가 정한 사례를 받는 삯군목자 입니다.
그리고 우리주님만이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받지않을 뿐아니라
그자신을 우리들에게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다.
분열의 시대속에 개신교는 무엇을 해야할까 고민해 보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너도 나도 광장에 나가거나 골방에 들어가자는 것이 아니다.
일제의 식민지속에서도 불의와 타협하면서도 교회를 지킨 이들이 있다.
우리는 친일이라고 여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불의와 타협하면서 지켜온 교회는 교회가 아닐까....
그 가운데 타협하면서 지켜온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닐까...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누군가는 지켜야하고 누군가는 순교해야만 한다면,
나는 순교자가 되고 싶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지켜야 한다고 하신다면,
엔도 수사쿠의 "침묵"처럼.....
쓰린마음 으로 순교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 평가는 분명 역사가 해줄것이지만, 하나님앞에서는 어떨까... 궁금하다.
광장속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할것인가?
골방에만 있었던 이들을 그저 관념과 추상에만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라고 할수 있을까?
그 자리를 지켜온 이들의 장소를 기억했으면 한다.
분명 역사가 판단하겠지만, 하나님앞에서 어떨지는 모르겠다.
개신교는 골방차원에서 머무는 종교가 아니다. '행동하고 실천하는 종교'다.
개혁을 너머서 평화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들'이며,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바라는 '현실주의자들'이다.
그 시작은 '기도'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암담함과 암울함을 보면서 서로를 향해 일침을 가하지 않기를 바라며,
누가 옳고 그르냐를 자신의 기준을 통해서 평가하지 않기를 바란다.
기도하였으면 기도한 그대로 행동하는 신앙인 되기를 바란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그게 한국교회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그것을 외쳐야 할것이다.
믿음과 신앙을 따라 골방으로 들어가라 광장으로 가라!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마라 골방으로 갔다면 광장으로 가고
광장으로 갔다면 이제는 골방으로 가라!
위의 글이 내 신앙적 양심에 타락으로 임하지 않도록, 행동하며 분투하는 신앙인이요 목사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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