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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복음주의'란?

복음주의 6 - 알리스터 맥그래스

by 그 길을 2011.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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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의 어두운 측면

  복음주의는 때로 부정적인 공적 이미지를 지닌다. 미국에서 이러한 이미지는 때로 복음주의의 극우정책과의 연관성에 의존하며 영국에서는 좀더 일상적으로 그 운동의 고립주의와 지적인 열등성, 특히 그것의 영적인 자만, 교회의 고립성, 사회적 무관심, 교회와 세계에 대한 비관주의, 그리고 문화적 속물주의에 의존한다. 부분적으로 그러한 부정적 이미지는 복음주의의 가치를 절하시키려는 관심을 지닌 자들에 의한 계속적인 성토에 의해 초래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사실일 뿐이다.

죄의식과 영적인 쇠약

복음주의는 자신의 어두운 면을 계속해서 지닌다. 어느 복음주의자의 설교와 상담가운데 좀더 걱정스러운 국면들 중의 하나는 종교개혁의 "죄의 인식" 교리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로부터지기 충족이란 세속적 가치관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인간의 자기 가치에 대한 존중 의식을 파괴함이 없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존을 긍정하는 자아 존중에 대한 진정한 기독교적 이해를 발전시킬 실제적 필요성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즉 이 사실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있어 중요하다는 말이다. 비록 어떤 복음주의 설교자가 종교개혁의 믿음에 의한 의인화 교리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로 인하여 이 점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실패를 통해 회중들을 파괴하였을지라도 말이다 초래된 죄의식의 생성과 마비, 그리고 자기의심이다

복음주의에 대한 알려진 비판들은 때로 복음주의가 자신의 목사들과 신도들에게 초래한 소진에 초점을 맞춘다. 그 운동에 대한 매우 높은 수준의 헌신은 때로 재난을 야기한다. 복음주의는 대단한 성공을 성취하였으며 상처받은 행보의 공정한 몫 이상을 생산한 것처럼 보인다. 내가 부분적으로 앞장에서 주목하였듯이 이러한 현상은 복음주의가 영성의 문제들을 충분하게 언급하지 못했다는 점과 지금까지 해 왔던 것보다 "인간적 요소"에 더욱 더 상당히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것은 또한 단지 "죄의식" 뿐만 아니라 온전한 복음이 충실하게 설교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복음 자체에 더욱 더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복음주의적 독단 주의

복음주의는 계속해서 자신의 적들을 대면한다. 그리고 그 적들은 복음주의를 약화시키거나 파괴할 궁극적 목표를 가지고 그 운동내의 약점들과 불 일치점들을 이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복음주의자 개인들은 그들이 복음주의의 진리가 위협에 처해 있다고 보이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것을 방어해야만 하듯이 성서가 하나 이상의 읽기를 허용하는 어느 곳에서나 서로 서로를 심각하게 대하여야 하는 그 책임을 전반적으로 그 운동의 영향력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이 이차적인 중요성을 지닌 문제들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는 것이 인식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논쟁의 가속은 유용한 목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그것은 결국 복음주의의 성숙성과 판단의 심각한 결핍을 나타낼 뿐이다.

복음주의적 우상화의 해악

나의 한 친구는 "복음주의는 위대하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연민을 느낀다"고 말하였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하다. 마치 복음주의가 일련의 사상이나 태도들인 것처럼 복음주의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모두 아주 좋다. 그러나 복음주의 지도자들로서는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하겠는가? 최소한 그가 보는 바로는 미국의 형태에서 복음주의의  모든 인간적 얼굴에 대한 관심에는 진정한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복음주의자들도 인간이다. 그들은 사태를 확실히 알기를 원한다. 만일 누군가가 그들에게 그것을 직접 말해준다면 그들은 귀 기울일 것이다. 이제 그것에는 잘못된 어떤 것이 없다. 문제는 복음주의 세계의 지도적인 인물주위에서 자라나는 개인숭배에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권위를 지니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에 대한 신뢰와 쉽게 뒤범벅이 될 수 있다. 타락한 죄성을 지닌 인간 본성에는 확신과 담대함을 지니고 말하는 사람을 신뢰하고 싶어하는 어떤 것이 있는 것 같다. 확고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확신에 찬 목소리는 말해지고 있는 내용에 대한 신뢰성보다 더욱 중요한 요소가 된다. 신뢰되고 있는 요소는 메시지 외에도 설교자인데 이들은 메시지 이상은 아니더라도 그만큼의 신뢰를 품는 요소이다. 앞으로 복음주의가 여전히 좀더 많은 영적 정치적 힘을 갖는다 할지라도 복음주의는 자신이 진정으로 기독교적이며 책임적인 방식으로 그 힘을 다스릴 수 있는 성숙성과 지혜를 소유하고 있음을 증명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야 복음주의는 세계기독교 내에서 자신의 점증하는 강력한 위치를 점유할만하다고 보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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