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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따라 (교회와 공동체)/공동체

경계선을 허무는 삶에 대한 단상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6.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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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존스의 "Dwell" 이란 책을 택하여 읽은지 일주일이 되었다. 세상을 위해 선교적 삶을 어떻게 살아내어야 할지를 영성적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성육신적 삶을 소개하며 세상에 보냄받은 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소개하고 있다.  내용은 영성의 측면을 다루고 있어서 쉽지않지만, 마음먹고 쉽게 읽으리라 한다면 얼마든지 읽을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읽고 싶지 않다. 책의 한 부분의 내용이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한참을 생각에 잠기게 하고 있다. 생각에 잠기게 한 문제의 글을 소개하겠다.

"예수님 방식의 영성을 추구한다는 말은 경계를 허무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문화가 그어놓은 온갖 경계로 가득한 세상을 산다. 인종과 민족의 경계, 사회적 신분의 경계, 정치적 성향의 경계, 종교와 생활 방식의 경계를 비롯해 온갖 경계가 즐비하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악명높은 죄인들이있다.
우리에게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문화가 그어놓은 경계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편안하게 살아가는데 너무나 익숙해져있다." [각주:1]

멋진글이다. 감히 여기에 내 생각을 덧붙이면...

경계를 허문다는 것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사셨던 데로 사는 성육신의 삶은 그자체로 경계를 허무는 삶이었다는 것 인정한다. 그러기에 더욱 경계선을 허무는 자로 살아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 경게선을 허문다는 것. 그런 삶을 산다는 것
통제와 단속내지는 인권을 유린하는 감시로서 누군가가 강요에 의한 것은 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경계선을 허무는 삶은 자발적인 것이어야 하며 더 나아가 사랑과 관심 긍휼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모임속에 소위 '정직한 나눔'이라는 아주 좋은 전통을 때때로 폭력과 같이 요구할때가 있다.
당신의 경계선을 허물라고 요청하는 것은 누군가에 의한 폭력이다. 때로는 열린사회라고 하여 개인의 사생활을 요구하기도 한다. 공동체라는 이름하에 개인이 가지는 창조성을 빼앗기도 한다. 개인의 보장을 상징하는 사무실 파티션조차 치워버리는 사회를 만들며 소위 "단속사회"를 만들수 있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그의 저서 "단속사회"에서 리처드 세넷의 의견을 빌어 사무실에서 벽을 없에 버리는 것처럼 누구든 서로를 볼 수 있는 가시성이 강화될수록 친밀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 대한 서로의 감시만 증가한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이상태에서 개인은 "침묵"만이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알게되어 "침묵"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세계와 단절하여 고립된다고 하였다. -[각주:2]

출석을 부르는 사회... 예배땐 아예 지정 좌석을 만들어서 누가 왔는지 안왔는지를 확인함으로서 잔뜩 긴장을 유도하는 사회... 그게 정말 공동체인가 싶다. 이런 사회는 철저히 고립시킨다. 살기위해서 살아간다. 침묵만이 유일한 대화다.  

나는 하나님나라가 요구하는 경계선을 허무는 삶과 지키는 삶의 긴장이 오늘날에 유효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경계선을 허무는 삶으로 나아가며 또한 경계선을 지킴으로서 개인안에 주어진 창조적이며 살림을 위한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가 요구하는 경계선을 허무는 삶은 먼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성경에 유무상통의 원리가 그것이었다. 먼저 성령에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필요를 따라 자신의 것을 나누었다.
성령의 충만함은 비로소 우리안에 있는 경계선을 완벽하게 허문다. 분명 하나님나라는 소외된이들을 향해 경계선을 허물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충만함 속에 가능하다. 우리는 무엇보다 움켜쥐고 싶은 속성과 고립되고자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령으로 인한 변화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나라가 요구하는 경계선을 허무는 삶은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함으로 가능하다. 빌립보서에 나오는 예수의 마음을 품은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성육신하시어 하늘과 땅의 경계선을 생명과 죽음의 경계선을 신과 인간의 경계선을 넘어오셨다.
그리스도를 묵상할때에 우리는 경계선을 허물수있다.
우리주님이 경계선을 허무신 것은 그자체로 자발적이었으며 사랑이며 긍휼이셨다. 겸손함이셨다.
어떤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을 요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만 기다려줘야한다.

경계선을 허무는 삶을 사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다.
먼저 우리 주님이허무셨던 것처럼 내 자신이 먼저여야 한다. 사랑과 긍휼과 겸손이 먼저다.
그게 경계선을 허무는 삶의 방식이다.

만저 긴장을 인정하자 경계선을 허무는 것과 지키는 것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아 경계선이 허물어지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오직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경계선이 비로소 허물어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묵상함으로 경계선넘는 삶을 깊이 적용할수있다

경계를 허무는 삶에 관하여.... 짧은 단상

  1. -베리 존스, "Dwell"(서울:성서유니온,2016)p.121. [본문으로]
  2. 엄기호, "단속사회" (파주:창비출판사,2014)p.57-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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