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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3.1운동 이후 해외에서 반응 (해외 언론을 중심으로)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9.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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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해외에서 반응 (해외 언론을 중심으로) 



(사진  이한응(李漢應, 1874년 9월 21일 ~ 1905년 5월 12일)  

대한제국의 관료외교관, 순국 열사(殉國 烈士)로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 @사진 공훈전자사료관 제공)


유럽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은 주영한국공사서리 이한응이다. 그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는 위기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일념으로 영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쳤다.  영국정부의 냉담한 반응앞에서 나라가 장차 무너지고, 온 민족이 남의 노예가 되리라. 구차스럽게 산다는 것은 욕됨만 더할 따름이라는 결연한 의지로 순국을 선택하고 말았다. 이한응은 190551232세의 나이로 음독 순국하였다.[각주:1]

이한응의 순국 이후 일본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영국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한국의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31운동이 발발하면서 영국 하의원에서도 19197, 192048월 세 차례에 걸쳐 질문이 있었는데, 헤이데이(Heyday) 의원은 한국민의 대표자를 국제연맹에 받아들이는 데에 찬조할 성의가 있는가를 질문하였고, 그런디(Grundy) 의원은 수원 제암리학살 때 일본군 제78연대가 한인 30여 명을 학살한 진상을 알고 있는가 등을 영국정부에 질문하였다.[각주:2]

이와 같이 31운동 이후 영국지역에도 한국의 독립문제와 관련하여 적지 않은 관심을 표명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한국의 사정을 널리 소개한 사람은 맥켄지(Frederick A. McKenzie, 1869~1931)였다

그는 1908년 뉴욕에서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이라는 312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저술하였다. 또한 맥켄지는 1910년대 맥켄지가 발행한 “Korea’s Fight for Freedom” 라는 책을 통해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평화적으로 저항을 시도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1910년 말 맥켄지가 발행한 “Korea’s Fight for Freedom”)

(맥켄지(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맥켄지가 자유를 위한 한국의 저항(Korea’s Fight for Freedom) 책에 게재한 흑백사진이다. 맥켄지는 일본군에 의해 비참하게 폐허가 된 마을 사진을 보여주고있다



  1908년 양평에 있는 의병들의 사진 (Korea’s Fight for Freedom)


아래의 글은 맥켄지가 한국친우회 창립대회에서 했던 연설이었다.

 

나는 조선인의 자유 및 정의를 위해 친우회라는 것을 조직함으로써 그들의 어려움(境地)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본회를 설립한 것은 감히 정치상의 목적에 나온 것이 아니고, 또 반일본적 정신에 의한 것도 아니다. 오직 금일 조선에 있어 사태는 인도상(人道上) 및 애국적(愛國的) 의무관념상(義務觀念上) 우리들이 묵시(黙視)할 수 없는 바이다. 오직 일본의 조선에 대한 근본적 오류는 그 동화정책에 있고, 저들이 조선인의 자유를 파괴시키려고 기도하고 있다. 일본정부로 하여금 폭학(暴虐)한 대조선 정책을 개선시키기 위해 일치 노력을 보일 것을 절실히 바랍니다.” (韓國親友會에 관한 건(1924. 10. 28))



2. 독일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사진 보쉬세 자이퉁(Vossiche Zeitung) 1923109일자 )

 

독일에서 전개된 재독 한인의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으로는 19231026일에 개최된 재독한인대회가 있다. 19239월 일본에서 이른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제는 이에 대해 한인들이 소요를 일으켰다고 하여 무고한 생명을 빼앗았다. 이같은 사실은 독일인으로 동양미술을 전공한 부르크하르트 박사(Dr. Otto burchardt)보시쉐 자이퉁(Vossiche Zeitung)1923109일자에 한인에 대한 대량학살(Japanische Blutherrshaft in Korea,1923)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직접 목도한 바를 게재하였던 것이다



(보시쉐 자이퉁(Vossiche Zeitung)1923109일자)


그는 192391일부터 8일까지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 때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였으며 이때 한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참상을 당하는 현장을 보았던 것이다. 부르크하르트(Dr. Otto burchardt)가 쓴 기사를 본 재독 한인들은 크게 분노하였고, 유덕고려학우회에서는 1012한인학살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전단을 제작하여 유럽과 미주, 상해 임시정부에 배포하였다. 이를 통해 재독한인들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항일의지를 대외에 알렸던 것이다. 당시 이들이 배포한 전단은 신한민보19231115일자에 저매인이 일본지진시 한인학살을 목도하고라는 제목으로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사진 신한민보 19231115일자 저매인이 일본지진시 한인학살을 목도하고” )

 

. 왜병(倭兵)이 동포 15,000명을 요코하마(橫濱) 군영(軍營)에 가두어 학살하다.

. 일본인민은 지진사변을 기회로 하여 우리 거류동포를 도처에 학살하다.

. 일본정부는 자신 인민 급() 군병의 만행에 대하여 한국 급 세계 이목을 엄폐코자 무선전신(無線電信) 급 기타 일절 통신을 절금(切禁)하다.

(홍선표, 1920년대 유럽에서의 한국독립운동, 452)



3. 미국의 반응

미국의 반응은 주로 정부, 선교사, 의회 등을 통해 공개적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한국 민족지도자들이 열강 중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과 윌슨대통령으로 부터 한국의 독립에 대한 지원을 기대하여 미국 정부에 접근하였으므로 이에 대응한 미국의 정책이 공개적으로 표명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919414~16일 필라델피아에서 미국의 기업가, 교육자, 언론인, 종교인들을 초청하여 첫 한인대회(韓人大會)’를 열고 국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진상과 일본의 탄압 등을 고발했다. 대회 마지막 날 이승만은 시위를 주도하여 독립관(Independence Hall)까지 행진하고 여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또 서재필 등은 한국의 친우(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미국 내에서 한국에 동정적인 여론을 일으키는 데 노력하며, 그 결과 미국 내에 17개의 지부가 결성되기까지 한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이같은 노력이 결실을 거두어 미국의 주요 신문들과 통신에서 한국문제가 계속 취급되었다(UP통신의 경우 한국 관계 기사가 290건에 달하였다고 한다)


(19194월 한인자유대회 시가행진 사진 한겨레신문사 )

 

필라델피아의 첫 한인회(韓人會) 모임이 성공적이었던 하나의 배경은 선교관계로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인사들이 많이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19197월 뉴욕에 본부를 둔 미국 기독교회 연합회의 동양관계위원회(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 of the 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an America)’의 이름으로 119페이지에 달하는 한국의 정세라는 소책자의 발간으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 팜플렛은 한국에서 일본의 식민정책부터 시작하여 각 지방에서의 시위상태, 일본의 탄압상, 고문사례, 특히 수원 제암리 방문기 및 선교사들의 관련설 부인, 잔학상에 대한 선교사들의 입장을 천명한 3·1운동에 관한 최초의 포괄적인 보고서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정세는 미국 내에서의 반일캠페인이 최고조에 도달 했을 때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1919713일자)와 미 의회에서도 거론되어 그 전문(全文)의사록(Congressional Record)에 수록되어 있다.




(사진: the new york times July 13 1919 "Horrors In Korea Charged to Japan."  일본에 의해 폐허가 된 마을과 교회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워싱턴타임스> 192235일자. “19193·1운동 이후 일본이 조선인들을 대량 학살한 참상을 고발한 윗 사진. 조선 소녀들에게 총구가 겨눠진 모습, 아랫 사진은 처형후 살아남은 조선인을 생매장하려는 장면.)


  1. (송재용, 『구한말 최초의 순국열사 이한응』, 재이앤씨, 2007, 26~27쪽) [본문으로]
  2. (『구주의 우리사업』(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23, 2008, 89~90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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