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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성경신학

데살로니가 전서 1장1절~10절 주해.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09.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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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도 끝남과 더불어 신대원의 1년이 지났다..
이번에 들은 최고의 수업이라 생각되는 갈라디아 데살로니가 수업은
참 지금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유익이 된다... 2학기과제로 살전1:1절~10절 주석을 올려본다.
교역자 수련회가 갑자기 제출시기와 겹치는 바람에 좀 어설프고 급하게 해서 제출했다..
좀 수정해야할 필요를 느끼지만 올려본다.
블로그에 각주를 올리는 방법이 참 힘들당...ㅋ 그래서 각주는 생략하고
참고한 책들만 올려보겠다^^
기왕에 시작한거....데살로니가 전체를 주석해볼까ㅋㅋㅋㅋ


데살로니가 전서 1장1절~10절 주해.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1:1상)"

(Pau/loj kai. Silouano.j kai. Timo,qeoj th/| evkklhsi,a| Qessalonike,wn evn qew/| patri. kai. kuri,w| VIhsou/ Cristw/|( ca,rij u`mi/n kai. eivrh,nh)

고대세계에서는 모든 편지의 시작은 똑같이 시작하는데 바로 편지 쓰는 사람이 누구인가 밝히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고 나서 인사말을 전하거나 하고 싶은 말을 썼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바울과 실루아노(사도행전에서는 실라라고 불리나 여기에 나오는 헬라어는 라틴어 형태인 실바누스이다.)와 디모데가 공동저자로써 인사를 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세 사람의 이름으로 편지가 보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울의 서신이라고 불리고 있는 이 데살로니가전서에 왜 바울혼자가 아닌 이 세명의 이름으로 서신이 보내지게 된것일까? 그러나 바울의 서신의 인사말에서 바울의 이름이 다른 사람의 이름과 함께 언급된 것은 드문 경우가 아니였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각 서신마다 강조하고 있는 바울의 사도의 호칭은 없어지고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자신과 구별하여 놓지 않음을 볼수 있는데, (참고: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1:1;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 고전1:1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 고후1:1)이는 먼저 사도성을 구분하며 변호하는 다른 서신과는 구분됨으로서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의 사도권에 아무런 문제 삼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추측은 실로아노와 디모데와 데살로니가교회의 개척 배경에 관한 것이다. 단지 이름들이 나오는 순서는 연령에 따른 것 같다. 그렇다면 왜 공동발신자로 서신을 보내었는지 그 이유와 각 발신자들이 누구인가를 면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바울이 교회를 개척할 때 대부분의 경우 그의 곁에는 동역자들이 있었다.

아마 이들의 이름이 데살로니가 전서의 공동발신자(공동저자)인 것은 일반적으로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이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며 이를 미루어 볼 때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운 이들의 수고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서신서 전체적으로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형을 쓰고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데살로니가교회를 세운 것은 바울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실라(Sila'")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행 15:22, 27, 32, 40; 16:19, 25, 29; 17:4, 10, 14, 15; 18:5)은 바울서신 (살전 1:1'; 살후1:1; 고후1:19)과 베드로전서 5:12에서 '실루아노(Silouano.j)'라고 불리는 사람과 동일인물로 본다. 특별히 사도행전 15:22절에 보면 실라에 대해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는 유다와 함께 사도와 온 교회가 택함을 받은 자(a;ndraj h`goume,nouj evn toi/j avdelfoi/j ; NIV: leaders among the brothers. '형제가운데 지도자들')이었으며, 그의 직무로서 예루살렘의 공의회의 결정 즉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위한 회의의 내용문을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전달할 인물중에 하나였다.(행15:23)

또한 그는 유다와 함께 선지자로서 교회를 권면하고 위로하는 직분을 가졌다.(행15:32) 종합해보면 실라는 사도행전의 저자의 표현대로 에루살렘교회의 대표자로서 편지를 전달하는 것뿐만아니라 (행15:30) 그내용을 '직접말로' 해석해주는 것이었다.(행15:27) 그리고 바울의 동역자의 위치(상하관계가 아닌 동등한 동역자의 관계)로서 훗날 전도여행에 동행하게 된다.

실라의 사회적 위치는 어떠했는가? 바울은 사도행전16:37에서 자신이 실라와 함께 로마사람(Rwmai,ouj)이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실라가 예루살렘 교회에 소속된 유대인이자 로마 시민권자였음을 알수있다. 종합해보면 김철홍교수의 논문 『바울의 동역자 실루아노』에서 찾아볼수 있듯이 "실라는 사도적 권위와 소명을 가지고 있던 바울의 동역자 였다. 그는 바울에게 초대교회의 예수전승을 전달해 준 사람중 한명이었으며, 바울과 함께 선교팀을 이루어 고린도와 에베소에 이르기 까지 그와 함께 선교팀을 이루어 고린도와 에베소서에 이르기 까지 그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전승을 전해주는 등 교회개척에 공헌을 했다. 또한 바울과 헤어진 뒤에도 벧전 5:12절에 실라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음으로 추측하여 마가와 더불어 벧전1:1절에 언급된 지명을 두루 다니며 교회를 세우며 선교활동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명의 공동 발신자로 디모데가 있다. 디모데는 바울서신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바울이 완전히 신뢰한 동역자로서 데살로니가(3:2,6), 고린도(고전4:17; 16:10), 빌립보(빌2:19)에서 독립적으로 목회 사역을 감당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디모데는 남부 갈라디아 성(아마도 루스드라) 출신이었고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에게서 출생한 아들이었으며, 바나바와 바울이 이곳에 처음 방문했을 때 기독교로 개종했다. 디모데는 바울과 실라와 함께 마게도냐로 가는 길에 동행했고(행16:1~10; 17:14,15), 후에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있었다.(행 18:5)

하나님 아버지와 주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1:1하)

바울은 수신자를 '하나님 아버지와 주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라고 정하고 있다. 바울의 서신서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교회를 묘사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th/| evkklhsi,a| tou/ qeou/ 고전1:2),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자'(롬1:7),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자들'(엡1:1)등 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살후1:1에서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 눈여겨 볼만하다

이것은 무엇인가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진 특징을 다른 교회들과 구분지어 놓는 역할을 함이 분명하다. 특별히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는 자가 되었으니....."(살전2:14),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살후1:4)"라고 말한 부분에서 사도바울은 여러 다른 교회를 데살로니가교회와 특별히 구분지어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을 준다. 하나님의 교회는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었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 안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분명 안에(evn)라는 두 진술에서 서로 다른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하나님 '안에'있다는 것은 그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이라는 의미인 반면에 그것이 데살로니가 '안에' 있다는 것은 단지 그것이 거하는 영역이 세상 안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또한 세상 안에서 산다."(참고 빌1:1; 골1:2등)

교회라는 단어의 헬라어 에클레시아(evkklhsi,a)는 "교회, 모임, 총회"였으며, 당시 고대 헬라사회에서 이 단어는 거룩한 의미로써 사용되지 않은 듯하다. 이교에서 회심한 헬라인들 조차도 이 단어의 거룩함과 관련된 의미를 조금도 연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신속에 등장한 에클레시아(evkklhsi,a)는 신자들의 무리라는 의미로 재빨리 변화되었다. 특별히 바울은 '안에'라는 의미를 통하여 교회는 하나님아버지와 주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함으로써 분명한 정체성을 확립해 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어떤 역할로서 작용했을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도 아닌 '하나님안에 있는 교회'였다. 이것은 바울서신에서는 드문표현이다. 바울서신에서 "하나님안에 있는" 이라는 말은 하나님안에서 자랑함(롬2:17; 5:11)이나 하나님안에 감추어짐(엡3:9; 골3:3)이란 용례로 사용되었다. 반면에 "그리스도안에서","그리스도 예수안에서",혹은 "주안에서"는 바울이 사용하는 특징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요15장의 예수께서 하신 '포도나무 가지 비유'를 연상케한다. 그것은 일종의 '연합'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있듯이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엡1장 과 고전12장 전체에서 살펴볼수 있는 바와 같이 교회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의 몸이라는 유기체적인 관점으로 보고 있다. 헬라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사도바울의 이런 표현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또는 그의 몸의 지체가 되었음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세상과 또는 유대공동체와 엄격하게 구분되는 표현이었다. 또한 박해와 환란의 시기를 통해서 불안해 하고 있는 교회에 그들이 하나님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싶은 바울의 심정이 깊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수있다. 즉 세상이 주는 시련속에서 교회의 평화와 안정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아들로부터 모든 교회의 생명과 힘과 안정됨이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너희모두로 말미암아.....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1:2)

(Euvcaristou/men tw/| qew/| pa,ntote peri. pa,ntwn u`mw/n mnei,an poiou,menoi evpi. tw/n proseucw/n h`mw/n( avdialei,ptwj)

우리가......감사하고 (Euvcaristou/men)이 복수형의 세 명의 선교사들 이미 앞서 살펴본 대로 모두가 실제로 이서신의 공동저자였음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바울서신에서 인사말이 끝나고 나면 바울은 바로 감사기도(thanksgiving)에 대해 말한다(갈라디아서는 제외, 감사기도가 없음). 수신자 교회의 어떤 측면들 때문에 자신이 항상 하나님에게 감사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할 때 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억한다고 하고 있다. '항상'이라는 의미로 쓰인 avdialei,ptwj는 기도를 할 때, 끊임없이 쉬지 않고 그 주제에 대해 기도한다는 뜻이 아니고, 기도하기로 정해진 시간에 그들에 대한 기도와 감사를 빼먹지 않고 포함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살전 2:13; 5:17).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1:3)

(mnhmoneu,ontej u`mw/n tou/ e;rgou th/j pi,stewj kai. tou/ ko,pou th/j avga,phj kai. th/j u`pomonh/j th/j evlpi,doj tou/ kuri,ou h`mw/n VIhsou/ Cristou/ e;mprosqen tou/ qeou/ kai. patro.j h`mw/n()

기억하다로 쓰인 므네모뉴온테스(mnhmoneu,ontej)는 "철저하게 기억하다"라는 의미이다(참고: 2:9; 살후2:5; 갈2:10; 엡2:11; 골4:18; 딤후2:8)게다가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기억(mnhmoneu,ontej)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삼중의 은혜, (곧"믿음, 사랑, 소망"- "pi,stewj avga,phj evlpi,doj"에 대해서는 유명한 고전 13:13과 함께 살전 5:8; 갈5:5,6; 롬 5:1~5; 골1:4,5를 참고하라.)에 관한 것으로 저자들은 이 은혜들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삶과 행위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 Bornkamm은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본질이다."라고 하였으며 Hunter와 그밖에 다른 사람들은 이 세 가지 용어가 바울 이전의 기독교 어휘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믿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셨다는 확신에 기초하며 사랑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현재의 관계이며 소망은 그들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것(빌1:6)과 밀접하게 관련 된다"

이를 John Stott는 보다 짧게 요약하기를 "각각의 요소는 외향적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것이고 소망은 미래 특히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강림을 향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각각의 세 가지 기본요소들은 F.F.부르스의 표현대로 신자들의 삶과 행위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는 것들이었다. “믿음의 역사”(work of faith)는 “율법의 행위”(the work of the law)와 대조되는 표현이다. 이 표현이 뜻하는 바는 교인들이 개종 후에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이웃들로부터 자신들이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구분된 새로운 삶은 살면서 하는 모든 행동들을 다 종합한 것을 가리킨다.

사랑은 수고가운데서 나타난다. 진정한 사랑은 수고로 이끈다. 수고가 없는 사랑은 단지 감정으로 끝나버린다. (갈5:6에서 등장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pi,stij diV avga,phj evnergoume,nh의 표현을 보라.) 특별히 수고 ko,pou 를 뜻하는 단어로써 해석한 'labor'는 '육체의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의 수고의 가장 알맞은 예를 어디서 찾아볼수 있을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이다. 이는 요15:13에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큰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신 말씀을 통해서이다. 예수그리스도역시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수고를 하셨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로부터 기억한 사랑의 수고는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형제들을 위한 사랑이었을 것이다(그것이 구제하는 것이었든지 간에 '실제로 5:14 살후 3:6-12의 언급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사랑의 나눔과 구제에 앞장선 교회임을 알수있다.) 그것이야 말로 주님의 지상명령인 '서로 사랑하라'를 통해 주님을 본받는 행동이 아닐까? 그리고 주안에 있는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소망의 인내는 소망은 인내(u`pomonh/j 로서 'endurance' 혹은 'steadfastness'로 해석)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필자는 인내의 의미가 단지 '참다'라기보다는 'steadfastness'의 의미인 '확고부동한'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환난과 역경 반대에 부딪혀도 단지 참는다 라는 의미보다는 '확고부동한' 자세로 인내한다는 의미가 더 다가온다. 소망의 인내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동료 시민들로부터 핍박을 당함에도 불구하고(2:14), 그들이 믿음을 버리지 않고(3:6), 장래의 소망을 갖고 '확고부동한 자세'로 핍박을 견디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소망은 곧 종말의 주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다(1:10; 살후 1:3-10) 우리 안에 소망이 없다면 인내할 수 없다. 하나님나라의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며 기다리게 한다. 이 기다림은 이 세상에서 신자를 활발하게 활동하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1:4)

(eivdo,tej( avdelfoi. hvgaphme,noi u`po. Îtou/Ð qeou/( th.n evklogh.n u`mw/n()

살전 1: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택하심을 한데 묶어 놓는다. 살후 2:13절에서는 약간다른 형태로 반복되었는데 즉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엡1:4절에도 "그리스도안에서 택하여"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택하셨으며 또한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사랑하신다. (신33:12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 시락서45:1 "모세 곧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입은자를 참조하라.) 그렇다면 왜 바울은 사랑하심과 선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가? 그것은 데살로니가교회의 어떤 상황적인 배경에서 살펴보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곧 이스라엘백성을 택하셔서(신 4:37; 왕상3:8; 사41:8,9 43:10; 44:1,2; 45:4; 49:7)이들을 통해 나머지 인류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신약에서 선택된 백성들은 민족적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안에서"-곧 하나님의 탁월하신 선택 자이신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함으로써- 선택된다. 이스라엘백서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롬11:5)가 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과 함께 묶어 놓음으로써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하나님 사랑함이나 노력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의 닥치는 여러 환란과 박해 속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고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김철홍교수는 이것을 선민용어(election language)라고 하였으며, 주석하기를 " Meeks는 이 표현들은 language of belonging이라고 부른다(Meeks, First Urban Christians, 85.) 이 표현들은 자신들이 누구이며(group identity), 자신들이 우월한 존재임(superiority)을 나타내어 그 그룹의 내적 결속력을 강화하고, 개인들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한 self-esteem을 높여준다. 교회는 처음부터 교회 밖의 사람들과 자신들을 분명하게 구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을 받은 그룹 vs. 받지 못한 그룹), 이것은 강력한 공동체감(sense of community)을 형성하게 했다."하며 이것이야말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박해 속에서도 든든하게 잘 버티며 성장한 공동체 가된 이유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너희들을 택함을 아노라(eivdo,tej()라고 함으로써 교회가 복음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비밀이 교회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음을 알게한다.

이는 우리의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1:5) (o[ti to. euvagge,lion h`mw/n ouvk evgenh,qh eivj u`ma/j evn lo,gw| mo,non avlla. kai. evn duna,mei kai. evn pneu,mati a`gi,w| kai. ÎevnÐ plhrofori,a| pollh/|( kaqw.j oi;date oi-oi evgenh,qhmen ÎevnÐ u`mi/n diV u`ma/jÅ)

우리의 복음은 (euvagge,lion h`mw/n) 우리가 전한 복음을 말한다.(참조 살후2:14; 고후4:3' 또한 '나의 복음','내가전한 복음' 롬2:16; 16:25; 딤후2:8)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복음'(2:2,8,9)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살후 1:8; 갈1:7)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복음의 창시자이시며 그리스도는 복음의 실체시고 사도들은 복음의 일차적 대행자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가 잘 견딘 것은 바울이 전한(세 명의 발신자들과 함께 전한)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후반부에 다루겠지만, 몇몇의 신학자들로 하여금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은 데살로니가서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견해가 굉장히 자리를 잘 잡고 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서가 바울의 가장초기 서신이라는 주장을 당연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과연 그러한가? 데살로니가전서에 나타난 '우리의 복음'이 신학자들의 견해와 같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의 완전한 형태가 아니 란 말인가? 이 부분은 살전 9절~10을 주해하면서 다루고자한다.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duna,mei) 여기서 '말로만'은 성령의 감동시키는 능력이 수반되지 않은 연설을 의미한다. 분명 바울은 그들에게 말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전2:4,5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아무리 훌륭한 선포이며 설교라 할지라도 말의 지혜는 "성령의 나타나심과 십자가의 능력"을 뛰어 넘을 수 없다. 그것은 듣는 자들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토대를 두지 않고 안전하게 하나님의 능력에 토대를 두도록 해주었다.

성령과(evn pneu,mati a`gi,w|) 성령이라는 단어를 바울이 능력과 큰 확신의 가운데에 둔 것은 성령은 그의 사역 중에 복음을 듣는 자들의 마음속에 능력과 큰 확신으로 사역하시기 때문이다. 즉 능력(duna,mei)은 성령의 능력을 말하며, 큰 확신(plhrofori,a|)는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주시는 내적인 깊은 확신이다.

큰 확신으로 (ÎevnÐ plhrofori,a| pollh)이는 "충만함" 충분한 확신, 충분한 보증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 지리에 대한 데살로니가 인들의 깊은내적 확신 그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성령의 사역의 증표를 가리킨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비록 말로 전하지만, 그것은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한다. 복음은 능력이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말로전하지만 듣는 이들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은 위대하시다. 이것이 복음전도의 능력이다.

너희는 많은 환란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 되었으니(1:6)

(Kai. u`mei/j mimhtai. h`mw/n evgenh,qhte kai. tou/ kuri,ou( dexa,menoi to.n lo,gon evn qli,yei pollh/| meta. cara/j pneu,matoj a`gi,ou()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환란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 롬 5:3,5에서 바울은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마음에 부음 바 됨이니"라고 한다. 기쁨은 또한 갈5:22에서 성령의 열매이다. 많은 환란 속에서 기뻐함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란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정당한 몫이라고 당연시했다.(요16:33 예수님의 메시지) 또한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을 받아들이면 반드시 고난을 당하게 될 것임을 예고했다. 누가는 바울이 이 교훈을 루스드라에서도 했다고 증언한다.(행14:22) 살전 3:4의 proele,gomen은 그 시제가 Imperfect로서 이것은 바울이 이 경고를 계속 반복해서 주었음을 암시한다. 바울은 이것을 일종의 운명으로 간주하며 이 박해를 받도록 운명 지우신 것은 하나님이다 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단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는 의미의 지적인 동의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이 변하여 사도들처럼 그리고 주님과 같이 환란을 당하나 기꺼이 참아내고 기쁨으로 사는 삶을 사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가 더 마음으로 다가오는 표현인것 같다. 이것은 십자가의 길을 연상케한다. 우리가 주님을 본받는 자 되었다는 것은 바로 주와 함께 그들처럼 똑같이 고난당함을 의미한다. 그들의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1:7)

(ste gene,sqai u`ma/j tu,pon pa/sin toi/j pisteu,ousin evn th/| Makedoni,a| kai. evn th/| VAcai<a|Å)

데살로니가교회의 본은 그들의 고향인 마게도냐 뿐만 아니라 남부인접한 아가야 지방에도 알려졌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박사가 말했듯이 '다른 사람을 본받던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된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그들의 본으로 삼은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그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위의 6절에서 밝힌바와 같이 기쁨으로 고난을 당함 변화된 그들의 삶속에서 사도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말도 할 것이 없노라(1:8) (avfV u`mw/n ga.r evxh,chtai o` lo,goj tou/ kuri,ou ouv mo,non evn th/| Makedoni,a| kai. Îevn th/|Ð VAcai<a|( avllV evn panti. to,pw| h` pi,stij u`mw/n h` pro.j to.n qeo.n evxelh,luqen( w[ste mh. crei,an e;cein h`ma/j lalei/n tiÅ)

데살로니가의 박해를 잘견딘 소식은 주님의 말씀과 함께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믿음에 대한 소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뿐 아니라(avllV evn panti. to,pw|)" 더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선교사들은 이 소식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유는 첫째로, 각 교회가 다 복음으로 인한 박해를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cf. 고후 8:1-5). 빌립보 교회, 고린도 교회가 박해당하는 것은 사도행전의 내용을 참고해야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누가의 기록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다 (예를 들어 고린도에서 바울이 갈리오 앞에 끌려간 이야기). 소문이 널리 퍼질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당시 각 지역 교회들 사이에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연락망(Network)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살로니가에 박해가 일어난 시점과 바울이 편지를 쓰는 시점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고려할 때, 상당히 짧은 시간 동안에 소문이 퍼져나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미 각처에 소문이 난 믿음에 대해서 말도 할것이 없노라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너희가운데 들어갔는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는지(1:9) (auvtoi. ga.r peri. h`mw/n avpagge,llousin o`poi,an ei;sodon e;scomen pro.j u`ma/j( kai. pw/j evpestre,yate pro.j to.n qeo.n avpo. tw/n eivdw,lwn douleu,ein qew/| zw/nti kai. avlhqinw/|)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갔는지 (o`poi,an ei;sodon e;scomen pro.j u`ma/j) 이말은 당시 데살로니가교회의 상황에 대한 것으로 '너희가 얼마나 우리와 우리의 메시지를 환영했는지' 라는 뜻이다.즉 빌립보에서 고난을 당한 후 데살로니가에 와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바울이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고, 이 복음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용기를 갖고 받아들였다는 점에 대한 소식이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돌아와서.....하나님을 섬기며...(evpestre,yate pro.j to.n qeo.n avpo. tw/n eivdw,lwn douleu,ein qew/| zw/nti kai. avlhqinw/|) 우상숭배는 헬라사상의 기초였다. 이 구절을 통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대부분이 헬라인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우상을 버린 것은 개종의 행위였다. 바울은 완전히 그들안에 있는 헬라의 사상을 완전히 무너뜨린 것이다.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 할때 사용하던 표현을 재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행14:15~17에 유사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루스드라 사람에게 우상숭배 행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였다. 메시지에서 나타난 동사(evpistre,fein)은 복음적인 회개라는 의미로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용어를 주께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사용했고(고후3:16, 구약인용문)또한 번은 복음적인 신앙에서 돌이킨다는 의미로 사용했다.(갈4:9) (유사구절은 행17:22~31 참고로 6:1~2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심은 이중적 해방 곧 이전에 우리가 종노릇하며 섬기던 우상들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하여 이제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의 해방을 포함한다. 과연 우리는 진정한 회심자인가? 스스로 정검하고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부분이 있다. 데살로니가인들의 회심 체험이 어떤 사실을 내포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이 간결한 구절에는 바울의 교훈에서 특징적인 요소가 빠져있다. 여기에는 어떠한 신학적 문제도 언급되지 않았으며(갈3:1; 6:14; 고전2:2; 롬3:25과 대조해보라.)단지 살전5:10에만 신학적인 특징이 나타나있다.

그래서 어떤 비평가들은 바울이 여기에서 바울 이전의 '세례찬송'이나 '선교적 설교'를 인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견해에 대해 그들은 그의 말이 구약과 유대교 특히 헬라파 유대교의 색채를 매우 가하게 띠고 있다는 것인데, 돌아서다(evpistre,fein),섬기다(douleu,ein),사시고참된 하나님(qew/| zw/nti kai. avlhqinw)등등 단어들이 바울이 잘쓰지 않는 단어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후3:16과 갈4:9들은 바울 자신이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것에 대한 헬라파 유대적인 용법을 따라 돌아서다(evpistre,fein)를 사용할수도 있었을 것임을 보여준다. 사시고 참된 하나님(qew/| zw/nti kai. avlhqinw)은 우상숭배를 배격하는 맥락에서 효과적으로 쓰이는 잘 정립된 문구였다. 과연 살전에는 바울의 중심이 칭의나 십자가 복음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수 없는가? 아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전체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그가 한 설교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을 것임을 추측해 볼수있는데 이어지는 10절의 설교내용을 통하여 알수 있다.

또 죽은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 지를.....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건지시는 예수시니라.(1:10) (kai. avname,nein to.n ui`o.n auvtou/ evk tw/n ouvranw/n( o]n h;geiren evk Îtw/nÐ nekrw/n( VIhsou/n to.n r`uo,menon h`ma/j evk th/j ovrgh/j th/j evrcome,nhjÅ)

바울은 구원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오시는 마지막 심판때에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지심을 얻는 것(evk th/j ovrgh/j th/j evrcome,nhj)으로 인식한다(5:9, 23; 참고. 4:6) 그러므로 바울이 데살로니가 인들에게 복음을 칭의, 즉 마지막 심판에서 무죄 방면되는 것으로 전파한것이 분명하다. 이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의 죽음에 기초하고 있으며 바울은 전통적인 케리그마의 죽음- 형식(death formula)으로 이것을 분명하게 밝힌다.".....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5:9~10; 참고 또한 4:14)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 분명히 전도할때도 강조 되었을 것이다.

바울이 마지막 심판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냄을 받는 것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기독론적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대행자(agent)로서(롬 5:8-11; 8:3, 32; 갈 2:20, 4:4이하; 고전 15:24-28). 만물을 심판하고 복종시키기 위해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 바울은 보통 "주"라는 칭호를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이라는 주제와 연관시키며 이서신서에서도 주의 재림을 설명하고 있다.(4:13~5:11; 참고 또한 3:13; 5:3) 여기서 "주"라는 칭호는 시110:1에 나오는데 그 구절은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모든 언급들의 성경적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분을 바울은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와 일치시킨다. 그리고 예수로 인해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것이야 말로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다.

Jamce Packer의 말대로 "우리 죄인들과 하나님의 진노의 암운 사이에 주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으며, 금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진노는 결코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신다(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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