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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해방후 한국의 신탁통치 논쟁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4.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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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한국 현대교회사 공부를 위한 정리다. 각주는 생략한다. 


1. 해방 후 한국의 신탁통치 논쟁


a. 8.15 해방과 모스크바 3상회의

8.15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는 일제로부터 받은 36년간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더 없이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해방이후 풀어야할 몇 가지 문제들로 인해 복잡하고 당황스럽게 되었다. 여현덕은 해방이후 생긴 두 가지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데, 먼저는 해방자체가 자 민족의 힘이 아닌 외세의 힘에 의존한 해방이었다는 점 그리 하여 민족의 자주성들을 스스로가 되찾아야하는 문제를 제기했고 체제를 달리하는 두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에 의해 해방되어 냉전체제가 등장하고 분열이 일어난 것을 극복 해야 했다고 한다.1) 즉 1945년 8월부터 한반도의 해방은 미국과 소련 두 나라에 의해 지역이 분할 점령 되면서 미국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 3 국외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제안하게 된다.

미국 측의 안은 유엔헌장 규정대로 한국에서 신탁통치를 실시하자는 것으로 미국 영향하에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의도였다.2) 그 결정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 공동위원회(共同委員會)는 조선민주주의(朝鮮民主主義) 임시정부(臨時政府)를 기타 각 민주주의 단체와 협력(協力)하여 조선을 정치적(政治的), 사회적(社會的) 및 경제적(經濟的)으 로 발전시키며 민주주의적 자치정부를 수립하여 독립국가로 육성시키는데 사명이 있다. 공동 위원회의 제안은 조선 임시정부와 타협한 후 미.소.영.중 정부에 제출하여 최고 5년간 4개국 조선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을 할 것이다.”3) 


이러한 모스크바 3상회의는 결국 신탁통치논쟁으로 이어졌고 논쟁이 과열되면서 결국 위 결의문은 파기된다.

신탁통치논쟁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을 낳게 되고 냉전이 급속도로 형성되는 촉매 제 같은 것이었다. 이 미소공동위원회의 신탁통치협정는 한국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 쳤을까? 이 신탁통치논쟁의 배경에는 카이로⦁포츠담선언이 그 중심이었는데, 간략하게 그 내용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카이로회담은 제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전후 (戰後) 한국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결정한 최초의 연합국정상회담을 말한다. 1943년 11월 27일에 발표된 카이로선언에서 미국, 영국, 중국은 한국을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자주 독립 시킬 것이라고 합의하였다.


“........전기(前記) 삼대국(三大國)은 조선인민(朝鮮人民)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 에 맹서코 조선을 자주독립시킬 결의를 갖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써 삼대동맹국(三大 同盟國)은 연합제국(聯合諸國) 중(中) 일본국과 교전중인 제국(諸國)과 협조하여 일본국의 무 조건 항복을 촉진재래(促進齎來)함에 필요한 중대차장기(重大且長期)한 행동을 속행(續行) 함.” 선언문 1943년 11월 27일4)

이 카이로선언에 대해 신한민보는 1943년 12월9일자 “카이로선언과 한국문제”라 는 글에서 ‘당연한 순서(In due course)를 적당한 순서‘5)로 해석하여 자주독립에 대한 기대와 들뜬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6)


그 후 1945년 7월26일 3대연합국의 포츠담선언문이 발표된다. 포츠담선언은 3국 의 정상들이 모여 7월 26일 포츠담에서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선언문이 다. 이 포츠담선언문 제 8항에 카이로선언문의 이행에 관하여 밝히고 있다. 이는 조선 의 적당한 시기에 자주독립 시킬 것에 대한 결의와 이행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기 때 문에 중요한 선언문이었다.


“제1항 我等 合衆國大統領, 中華民國政府主席 及 大英帝國總理大臣은 我等의 수억 국민을 대표하여 협의한 결과 일본국에 대하여 今次 전쟁을 종결시킬 機會를 賦課키로 의견이 일치 되었다........... 제8항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며.......”7)


그러므로 신탁통치 논쟁에서 카이로⦁포츠담 선언문에 등장한 조선의 자주독립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완범은 당시 정치세력가들이 제 기한 신탁통치논쟁을 살펴보면서 우익세력은 자신들이 반탁운동을 주도했다는 점을 강 조 부각시키면서 반탁은 자주독립의 길이요, 민족통일의 길인데 반해 좌익의 찬탁은 매 국의 길이요 민족분열의 길이라고 평가하였다고 하였다.8)

우익과 좌익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 전해지자 한국 내에 신탁통치논쟁은 거 의 반탁으로 일치된 의견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좌익측은 공식적 태도를 유보한 채 1946년에 접어들면서 찬탁노선으로 전환하였다. 이들의 전향에 대해서는 많은 가설 이 있지만, “3상회의 결정을 바르게 인식하자”라는 구호아래 3개국의 원조와 협력 신탁 은 독립을 촉진하는 진보적 조치라고 강조하였다.9)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支持) 담화문(談話文)을 발표하였다.

“.......소위 반(反)신탁운동은 조선을 위하여 극히 위험천만한 결과를 나타낼 것은 필연이다....... 이번 모스크바 결정은 카이로 결정을 더욱 발전 구체화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무엇보다 먼저 통일의 실현에 있다.”10)


 

좌익의 경우 찬탁을 지지한다는 표현보다는 삼상회의,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편 한민당을 중심으로한 우익측은 신탁통치에 대한 입장을 강경 하게 밝혔다. 신탁관리제를 배격하는 국민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 민주당에서는 27일 오후 3시 동당 회의실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막부 삼국 외상회의서 소련이 조선의 신탁통치를 주장하였다는 설에 대하야 절대 배격한다는 좌(左)의 결의를 하였다....... 본당은 생명을 걸고 이 제안을 배격하는 동시에 독립관철에 매진하기를 결의함“11)


‘東亞 45年 의 證言(11)’ 에서 김준연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회고(回顧)하기를,


“이 소식이 1945년 12월 27일에 서울에 전해오자、전 국민은 극도로 흥분하게 되었다。완 전독립만이 우리 민족의 염원이었기 때문에, 당시 동아일보 사장을 겸했던 고하 송진우 선생 을 수석총무로 하는 한국민주당에서는 27일에 즉각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이에 대하여 『절대 배격한다』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표명하였던 것이다.”12)


임헌영에 따르면 삼상회의를 탁치에다가 초점을 맞춰 피부적이고 본능적인 반대운 동을 전개한 것은 보수적 지식인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탁치반대에 적극적 으로 가담하지 않은 세력에 대하여 민족반역자이며 역도라는 비난을 서슴치 않았다고 하였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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