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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책과 삶

하나님나라의 비밀은 교회?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6.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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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하나님나라의 구속의 분출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신학은 구속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의 성격자체가 구속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가 임할 때 정의가 실현되고 평화가 이루어진다. 옛 선지자들이 선포한 대로 슬픔도 없고 질병도 가난도 없는 그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오직 완전한 구속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구속적이라고 한다.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구속에 관한 중요한 네 본문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복음서의 네 본문은 마 12:28; 11:2~6; 8:14~17; 2:1~11 10:10 이다. 이는 예수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나라의 구속사역이 어떠한지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은 사역들을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임하였으며, 하나님나라의 구속과 동시에 세상속으로 들어와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고칠뿐아니라 도덕적으로 제도적으로 해방시킨다.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구속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나라의 구속이란 무엇일까? 그는 무엇보다 통전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통전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두 스펙트럼 사이에서 통합을 시도한다. 즉 복음전도와 정의의 문제, 영적차원의 사명과 사회적 차원의 사명의 두 극단에서 통합을 시도한다.

 

그는 먼저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복음전도의 우선성을 인정하시만 그 사명의 사회적 차원을 위한 자리가 무엇보다도 세상에 대한증인으로서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고 밝힌다.

 

이에 관하여 나 역시 복음주의자로서 동의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소위 복음주의자 내지는 복음주의를 지향하는 교회의 대부분 복음전도의 영혼구원 측면을 매우 강조한다. 저자가 말한대로 두 극단이라는 표현이 현실이다.

떡이냐 복음이냐를 두고 교회마다 공방을 오고가고 있으며, 심하면 교단이 분열되거나 이단시 정죄하기도 한다. 좀더 건강한 교회경우에야 사회참여를 어느정도 미덕으로 여기며 지역사회 봉사 정도로 교회의 이미지를 위해서 노력하기도 한다.

이들의 공방이 오고가는 데는 두 분야를 굳이 극단적으로 이해한데서 라고 생각한다.

 

로잔언약(Lausanne Covernant)은 교회가 희생적으로 해야할일 중에서 복음전도가 최우선이다 라고 하였고, 존스토트는 이에 관하여 이렇게 해석하였다. 그는 두 가지 방식으로 지지하고 설명할수 있다고 하였다.

 

첫째 복음전도는 분명한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둘째 복음전도는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과 상관이있다.

 

즉 존스토트는 복음주의의 목표이며 결과가 복음전도이면 우선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전도가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과 상관이 있다는 것에 관하여는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은 그들을 하나의 전인(全人)으로 여기며 섬기도록 이끌 것이기 때문에 굳이 이 두 극단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저자 역시 통전적 구속은 교회의 자리안에서 영적 구속과 사회적 구속 두가지 모두를 이뤄낸다고 강조한다.(278)

 

 

둘째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하나님나라 백성가운데서 이뤄지는 다차원적 구속에 초점을 맞춘다고 하였다. 그는 구원의 다차원적 성격에 대해서 고찰을 시도한다.

먼저 구원은 죄에서 또는 바울이 말하는 우리의 아담적 상황으로부터의 구원이다. 또한 구원은 우리를 악한 자의 지배로부터 구해낸다. 마지막으로 구원은 조직적인 악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한다. (279-82))

 

이 부분에서 사실 저자에 대해서 아쉬운 부분들이 드러난다. 어떤 의미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저자는 사실 위에서 말한 구원에 다차원적 의미 그리고 그 구원을 가져다 주는 참된 해방의 의미를 어떤 현실에서 해방과 구속에 대한 의미보다는 영적인 의미로서 즉 마귀, 죄, 악한 권세 등등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 독자들을 이해시키고 있다.

 

그러니 결국 저자가 말하는 "구속의 통전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는 본서를 읽으면서 이미 밝힌 로잔언약의 내용이나 각족 복음주의 선언서의 전문들을 보면서 복음전도와 사회복음의 긴장을 완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겠거니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저자는 구속에 대한 다양성을 영적인 의미로 더 다가가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니 두 극단에서 통합을 시도하려 했던 저자의 의도가 더 모호해지는 느낌을 갖게되고 더불어 과연 저자가 말하는 통전적 구속이란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정사와 권세에 맞서는 일은 무엇보다도 이세상의 악한 제도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물들지 않은 지역 교회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부분이 가장 동의할수 없는 부분인데, 저자는 사회와 법, 경제적 불의, 인종주의, 공동 선에 대한 저항을 하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해야하지만,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일이라고 여기는 유혹에 대해서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고 밝힌다.

(283)

 

그래서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여기서 오직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진 구속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나라가 곧 교회라는 입장을 계속 견지하면서 그는 구속적 측면도 오직 교회라는 상황속에서 통전적 구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밝힌다.

즉 저자가 말하는 통전적 구속은 교회안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이다.

 

어떤 의미인지를 알겠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들에게 어쩌면 따끔한 일침이 될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저자가 시종일관 주장하는 하나님나라와 교회가 어떻게 같은 선상에 놓여있을수 있을까 싶다. 과연 교회안에서만 하나님나라일수 있을까? 그렇다면 저자가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실천적인 측면은 무엇일까?

결국 저자가 말하고 싶은 하나님나라의 비밀은 교회인가? ㅎ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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