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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신뢰의 길

인간이란 무엇인가? 얍복강의 야곱을 통해.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7.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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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2장 24~26절
 
1.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야곱은 홀로남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씨름을 걸어왔다. 
낯선이가 씨름을 해온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뭔가 나이스하며 규칙을 동반한 그런 스포츠 운동은 아니다.
그자체로 그것은 생존을 위한 싸움인 것이다. 

WBC의 고든 웬함은 이 문맥을 이렇게 해석한다. 

“그가 싸웠다"(P삐 -바예아베크)는 동사는 오직 여기와 26절에만 나오는데, 분 명히 야보크(P:J')라는 이름에 대한 언어유희이며, 아마도 야곱(그pll’ -야아콩)이라는 이름에 대한 말장난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그가 그를 압복했다 (he Yabboked hlln)" 또는 “그가 그를 야곱했다(he Yabboked hlln)"로 1:l}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웬함, 526) 

얍복이라는 지명의 어원을 살펴야 겠지만, 성경저자가 얍복이라는 말을 '싸웠다'(야베크, 야보크)로 언어 유희를 했다는 해석이다. 
그런의미에서 얍복강가는 한 인간이 목숨을 건 싸움의 현장인 셈이다. 그는 “야곱" 즉 “그가 발꿈치를 잡았다” 라고 불렸다. 즉 모든 것이 상징적이다.(웬함, 337) 그랬다. 야곱은 붙잡고 놓지 않았던 사람이다. 

김세권목사는 그의 책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아카브'에서 왔다. 이말은 '붙잡다' 라는 뜻과 '보호하다'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야곱은 지금까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악착같이 살아왔다. 손에 붙든 것은 포기한적 없으며 아무리 악한 상황에서도 그의 꼼수는 
살아 빛을 발했다. 또한 하나님이 늘 도와 주시고 보호해주셔야만 하는 삶을 살아온것도 사실이다.(337) 

김세권 목사의 언급처럼, 야곱은 그이름처럼 살기위해 붙잡고 살았다. 인간적 욕망을 붙들었으며, 인생을 붙들었으며, 
이기기위해서 붙들고 살았다. 그리고 한편 하나님이 그의 삶을 보호해주셨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온 한 인간과 끊임없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치열하게 공방하는 현장은 그 이름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치열한 현장은 하나님께서 얍복이라는 장소로 야곱을 이끌면서 다시 시작된다. 
고든 웬함의 해석처럼, 얍복은 진정한 야곱됨을 보여주는 장소인 셈이다. 

목숨을 위해서 치열하게 붙들고 씨름하는 존재요. 이기기위해서 사는 나약한 존재가 얍복에서 한 남자와 씨름을 한다. 
생존이 걸린 싸움을 하는 것이다. 싸움을 걸어온 그 낯선이의 행방과 실체에 대해서 야곱은 모르는 것 같다. 그 낯선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씨름을 걸어오신다. 
우리의 인생의 깊은 공허함과 허무함으로 인해 무언가를 붙들고 싶은 순간 찾아오신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이 얍복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우리의 이름과 닮아있는 인생 한복판에서 치열한 싸움을 걸어오신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생각보다 은혜롭지 못할때가 있다. 대부분 그 기억을 은혜롭고 뭔가 아름다운 기억으로 추억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만남은 그 하나님께 굴복하는 순간이요 우리의 인생이 아주 비참한 존재이며, 피조물이라는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말그대로 하나님이 씨름을 걸어오시는 순간이며 그 씨름은 생사를 건 싸움이다. 
그 싸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유한한 존재이며 피조물이며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지금까지 붙들고 왔는지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말그대로 하나님과 만남은 좋은 경험이 아니다. 
하나님앞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2. 25절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때 어긋났더라. 
상대방이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았다고 진술한다. 낯선이가 누구인지 아는 독자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이기지 못했다는 진술에
당황스러움을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길수 없다니 말이다. 
그것도 야곱이라는 인물을 말이다. 자기힘으로 살아온 한 인생을 하나님께서 꺾거나 이길수 없다니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힘으로 이길수 없었을까? 
하나님은 봐주신 것이다. 져주신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꺾어버리고 그의 자존심을 바닥에 내릴수 있으신 분이
왜 져주신 것일까? 그런데 야곱은 알고 있었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어긋났더라 라는 구절에 대해 고든 웬함의 해석은 이렇다

 야곱에게는 상대가 자기의 환도뼈를 치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탈구( dislocate)시키거나 혹은 마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룬트(Lund,JBL 105[1986J 99 주석 527 103)는 “마비시키다(numb)"가 역본들이 선호하는 번역이라고 말한다. 베스터만 (Westermann)은 “그래서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되었더라”를 후대의 첨가물로 여긴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 야곱이 계속 싸운다는 것 이외에 이 가설은 근거가 없다. 오히려, 이 절은 야곱의 상황을 통찰하게 한다. 환도뼈를 쳐서 탈구시킨다는 것은 상대가 초인적인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나타낸다(참조. 사 6:7).  

그는 자신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난 상황을 보면서 더이상 싸울수 없었으나 그냥 살기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린것이다. 사실 이싸움은 진거다. 
명백히 누가 봐도 야곱이 이긴싸움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았다고 하신다.  
그래서 주석들은 이기다 해당하는 '야콜'이 승리를 얻다(삼상26:25) 뜻 뿐아니라 능력이 있다(13:6; 출 7:21) 우세하다(왕상22:22; 렘3:5) 란 의미도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패배했다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을 꺾을수 없었다는 의미라고 해석한다.(옥스퍼드 주석456) 그는 살기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꺾을수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다.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성공, 매달림)것이다. 
그런의미에서 그가 하나님이 이기지 못함을 보고라고 해석하면 무리가 없을 것같다. 
 
3. 26절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공동번역을 보니 "그분은 동이 밝아오니 이제 그만 놓으라고 했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놓아드릴 수 없다고 떼를 썼다."

야곱은 필사적으로 매달린다.하나님의 사자에게 매달린 그는 그의 이름 "붙잡다"와 그대로 연결된다. 
하나님을 붙들고 있다. 살기위해서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방식의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의 원래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때때로 설교를 통해서 경건서적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붙들라고 그안에 평강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인간이 하나님을 붙들때 지끔껏 살아온 인간적 본성이 드러난다.
인간의 탐욕과 욕심을 붙들고 살아온이는 인간의 탐욕과 탐심의 전존재가 드러난다.
무기력과 음란 게으름을 붙들고 살아온 이는 그 삶의 모습 그자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한 인간은 하나님앞에 나아가 그분을 처절하게 붙들때 그 드러나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깊은 비참을 느낀다. 두려움을 느끼고 인간됨을 느낀다.  
평안은 그 두려움을 통과해야 얻는 것이다....

야곱은 지금 하나님을 붙들고 있다. 생존을 위한 것일수 있고,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방식대로 매달리는 것일수 있다.
그의 존재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간됨을 여실히 보여주는 매달림이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그의 본질을 건드린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니이다. 
필사적으로 살기위해 붙들고 이기기위해 붙들고 매달리고 있는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네 저는 야곱 (붙잡는 자) 입니다. 

4. 27절 그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다.
그는 신비한 이 인물에게 축복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이름대로 매달린다. 
축복을 얻어내기 위해서 형을 속이고 살기위해서 머리를 쓰고 다른이들을 속이며 살아온 야곱이었다. 
그런데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는 붙들만한 무언인가가 없는 혼자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있다. 
살기위해 몸부림 치고 있고,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름을 통해서 꺠닫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 28절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의견이 생각보다 많다. 하나님과 겨루어이기다 라는 가당치도 않는 말을 국호로 쓸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됨,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라는 어원의 언어적 유희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각주:1]  

무엇보다 이름을 바꿔주신 것은, 그의 인생에 새로운 존재로서 살도록 기운을 불어넣어주신 사건이다.
한낫 살기위해서 붙들고 사는 존재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죽음에서 벗어남)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은 
지금 현재 에서를 만나러 가는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에 능력이 되고 보증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인생에서 이 사건을 잊을수 없는 사건으로 이름짖고 있다. 

6. 30~31절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 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그 사건에 이름을 짖는다. 브니엘의 뜻은 '하나님의 얼굴' 이라는 뜻이다. 학자들은 브니엘이 마하나임과 숙곳 사이의 어딘가에 얍복강가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오늘날까지도 그 위치가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브니엘이라는 지명은 위치의 중요성 보다 그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사건이다. 더나아가 그가 하나님을 보았지만 죽지않았다는 사실이다. 치열한 몸싸움 과 붙들고 매달린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겐 열정을 다하는 기도 또는 목숨을 건 기도의 어떠한 면을 보여준다. 
고든 웬함은 그의 주석에서 또 이렇게 해석한다.

 야곱에게 있어 이 조우의 가장 중요한 연은 “내가 하나님과 대변하여 보 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η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사람을 치명적인 위험 에 빠뜨린다(참조 출 33:20; 사 6:5). “보전되었다”라는 문구는 12절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에서의 손에서 건져 달라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았다는 것을 야곱은 인정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고도 살아 남았다면, 그는 에서와 만나더라도 살아 남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 생사를 건 싸움에서 매달리고 버텨낸 것,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뒤 그는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 그는 살아있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그는 살았다. 이 사실은 에서를 만나고 앞으로의 모든 신앙의 여정에 힘을 주고 능력을 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세가지 부분으로 묵상해보고자 한다. 

 먼저 하나님이 야곱에게 씨름을 걸어온 사건은 그 자체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게 한다. 인생의 위기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말이다. 물질을 붙들고 살아온 인생, 탐심과 탐욕을 붙들고 살아온 한 인생에게 찾아오셔서 함꼐 씨름하시는 사건 그게 성육신이다. 

 둘째 더 나아가 복음 사건을 묵상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살아난 것은 인간편에서는 복음이요 은혜다. 십자가의 흔적은 내가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해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브니엘의 사건을 통해 이전의 야곱은 죽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라는 이름을 통해 그는 다시 태어났다. 죽고 사는 일이 이 얍복강가에서 일어났다. 그는 씨름을 통해 죽음을 경험했다. 그리고 살아났다. 얍복강가의 브니엘 사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묵상하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기도가 어떠해야하는지를 묵상한다.기도는 인생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 순간 내 인생에서 붙들며 살아온 것이 무엇이지 생각이 난다. 기도는 하나님꼐서 임재하셔서 우리로 아담적 본성안에 살아왔던 삶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뜻과 통치에 굴복하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치열한 생존의 자리이며 그러므로 인간 무엇을 붙들어야 하나 인간 본질의 고민을 한다. 그러나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수록 비참함과 절망을 경험하지만 그 절망과 두려움 넘어 오히려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이것이 기도다.  

31절에 보니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다는 구절은 그가 만난 하나님, 그가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했던 그 사건은 꿈도 아니요 환상이 아니라. 몸으로 경험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이 그에게 흔적을 남기신 것이다. 그는 해가떠오르는 보며 새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이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다리는 절었지만, 하나님을 만난 그 감격으로 흥분했을 것이다. 그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으므로 그것을 꿈이라고 환상이었다고 할수 없었을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 같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을때 제자들과 더불어 생선요리를 드신다. 왜그랬을까? 어떤 청년이 재미있는 대답을 하였다. 생선가시가 남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남아있는 생선가시를 통해서 그 흔적이 믿음을 견고하게 해준다. 허벅다리의 관절로 인해 저는 야곱의 모습은 그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가? 지금껏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를 견고하게 만들어주고 까먹지 않게 하는 흔적이 있는가? 

바울이 말한 십자가의 흔적이 있는가?  

  1. 본문이 제시하는 이스라엘의 어원은 “이스라엘"(~₩)을 동사 사라(깨, “씨름하 다, 싸우다")에 결부시킨다. 따라서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엘(El; God)이 싸우신 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네가 하나님과 씨름했다R와 똑같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의 통속적인 어원들은 정확한 역사적 어원이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이름에 대한 언어 유희의 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싸우심”이라는 개엽 이 이스라엘 자손의 신학과는 양립하지 않아서, 이스라엘의 진짜 의미는 틀림없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따라서 겔러(Geller, JANFSCU 14[1982J 53)는 헬라 (그리이스)의 번역자들(띠X, Aq뻐a, Syrnmachus)과 불가타역본을 따라서, 그것을 사라르(배, “다스리다, 강하다")와 관련짓는다. 자롭(E. Jacob, Thα'Jlogy of the OT. 203)은 다른 고대의 시적 이름인 여수룬(Jeshurun: 신 32: 15: 33:5, 26)을 비교하여, 이스라엘을 야사르(ï!Zi', ‘의로운 올바른")와 결부시킨다 올브라이트(Albright, JBL 46[1927J 159)는 그것이 “치유하다”를 의미하는 이디오피아 및 아랍어의 어간과 연 관된다고 제안했다. 따라서 이 단어는 “하나님이 치유하신다”를 뜻한다는 것이다, 쿠테(R.B. Coote, HTR 65[1972J 1때)는 그것을 보통 “통치”로 번역되는 명사 미스라 (미때디)와 관련짓는다(예를 들어, 사 9:6[5J). 따라서 그는 이름을 “엘이 심판하신다” 로 설명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소서”를 뜻한다는 노트(M. Noth)의 초기의 제안(Personennamen, 208)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로스(Ross)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다른 제안들도 창세기 본문에서 주어지는 통속적인 어원과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하나님이 어떤 사람과 씨우신다는 개념도 문구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확실히 문제가 없는 것은 아 니다. 그리고 설명에서 강조점의 뒤바꿈(‘하나님이 싸우신다’에서 ‘하나님과 싸우다’ 로)은 통속적인 어원들의 본질 때문인데, 통속적인 어원들은 이름의 중요성을 표현 하기 위해 그 이름의 소리나 뜻에 대한 언어유회에 만족한다"(BSac 142[1985J 348 -49). (고든웬함,52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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