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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책과 삶

아픈이들과 동행하는 삶, <복음과 상황 2016년 5월호>를 들고서....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6.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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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간/ 영국부르더호프 공동체

 

"아픈이들과 동행하는 공동체" 를 읽고서.....

-다시 기독교를 말해야 할 때- (복음과상황 216년 5월 306호)   

 

 

                                                      

 

복음과 상황은 교회 사역자로서 내게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대학시절 나는 "하나님나라"라는 단어와 그 신학에 꽂혀

 

캠퍼스에 하나님나라를 위한 운동을 열심히 했다.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신학교야 말로 복음의 사각지대라고 생각했고

교회의 지도자가 될 신학생이 변화되어야 한국교회가 변화될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원투원하며 복음선포적 삶을 위해서 자극하였고 도전했다.

 

 

청년사역을 하면서도 청년들이 서있는 곳에서 직장이든 캠퍼스든 가정이든 어느 곳에서

그나라와 그 영광 그리고 그분의 성품이 드러나는 삶을 살자며 그렇게 사역했다.

 

 

그렇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며 애쓰며 살아온게 고작 10년이 흐른거 같다.

과연 지금 나는 그 하나님나라를 나와 내 주변에 임하도록 하고 있는가?

 

 

그 고민이 대폭 넓혀지면서 그저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 시점에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 것이 바로 복음과 상황이었던것같다.

 

 

창문과 같은 역할이라면 역할이다. 집안에 갇혀 있는 내게 밖은 어떤지,

내가 살아내어야 할곳은 이곳이 아니라 창문 밖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사역자로서 자칫 내가 살아내어야 곳이 교회라고 생각하며

창문너머의 세계 곧 현실적 삶을 잊을때가 너무 많다.

 

내주변은 모두 그리스도인들 뿐이며, 예배가 넘쳐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저기서 들려지는 그런 삶을 살아오기 때문에,

현실에서 흘러오는 인간의 고난이며 아픔이며, 질병과 장애며,

슬픔을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질때가 많다.

   

오늘 복음과 상황을 통해 또다시 고민에 빠진다.

복음과상황 216년 5월 306호 아픈이들과 동행하는 공동체"

-다시 기독교를 말해야 할 때-를 읽고서.....말이다.

 

 

글쓴이 이건은 10년여 브루더호프공동체에서 살고 있다.

몇페이지 안되는 짧은 글이지만 읽는 내내 드는 질문이 있었다.

한국교회 한국 사회에서 부르더 호프같은 공동체가 가능할까?

한국교회가 문제라는 것은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

공동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글쓴이는 "공동체로 산다는 건 곧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라고 했다.

내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은 희생정신과 연결이 되면서 동시에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짐이며 내가 가진 약한 육체며

감당할수 없는 무게들을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내 자신을 내어주며 섬기고 희생하는 것 뿐아니라

기꺼이 내 자신을 다른이들에게 의탁하는 것 까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자신을 의탁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주님께도 의탁할수 없다.

그리고 내 자신을 내어줄수도 없다.

 

 

"돌볼때 돌봄을 받고 자신을 내어줄때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48)

 

 

하여간 글쓴이는 부르더호프 공동체에서 만난이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공동체란 무엇인지를 깊이 경험한것같다.

 

 

"교회의 처음모습은 급진적이었다. 빚을 갚지 못해 쩔쩔매는 형제를 대신해 감옥에 가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기 위해 노예가 되었던 그들의 마음 속엔 오직 예수밖에 없었다.

다 버리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곧 어려운 이웃을 위해 전부를 바치는 삶이라고 그들은 이해했다.

 

 

칼 바르트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크리스도프 볼룸하르트는

인류발전의 가장 큰 장애는 "일요일만 지키는 신앙" 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삶의 전부를 드리지 않는 기독교는 결코 무해하지 않다.

스스로 에게도 그리고 사회에도 그것은 치명적이다.........

자신을 찾아오는 무리들을 향해 총제적이고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요구하며

내뱉었던 세례요한의 독설이 오늘 당신의 귓전을 때리고 가슴을 철렁이지 않는다면

다신의 기독교는 이미 4,000년전 아브라함과 땅속에 묻혔다......"(46-7)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일요일만 지키라고 한다.

일요일을 지키기위해 투쟁을 하고 목숨을 건다.

얼마전 주 5일제에 대한 정책때문에 교회들이 난리가 난적이 있었다.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것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될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그런의미에서 더이상 사회의 아픔,

일상이 하나님나라가 되게하는 움직임을 잃어버린 몸집만 커저버린 집단이 되어버렸다.

몸집이 커저버린 집단은 소리만 클뿐이다.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는 삶 전부를 주를 위해 드리는 공동체이다.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관심을 갖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관심이 많은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하는 것뿐아니라

지금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어떤지를 알아야한다. 창문너머의 세계가 어떤지 알아야 한다.

 

 

차별금지법에 의해 동성애 반대가 극심하다. 현실이다. 장애인들이며,

여전히 세월호로인해 가슴아파하는 이들이 많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슬픔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살아내어야 할 세상이다.

 

 

우리가 이 세상역시 우리가 살아야할 공동체라고 여긴다면,

기꺼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세상에 자신을 내어줄뿐아니라,

우리의 짐을 의탁해야할줄도 알아야한다. 우리는 그저 어린아이들 같다.

일요일만 지키려는 이상한 집단들 같다.

 

 

예수가 누구일까.... 그리고 내가 살아야할 이곳은 어떤 곳일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목회자로서 지금의 고민을 언제까지 할수 있을지 솔직히 잘모르겠지만,

창문밖의 세계를 그저 연민만하고 싶지 않다. 창문을 나가 풀잎냄새도 맡고,

아픔의 소리도 듣고 , 구름낀 푸른하늘과 더불어 먹구름속의 비를 맞으며 걷고 싶기도 하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하나님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면,

 

그 현실이 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에언자들이 외쳤던 것처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43: 19~20)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는 삶...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피는 것을 보는 삶 살게 될것이다.

 

 

그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삶아닐까 싶다.

 

진심으로 아픈이들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낼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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