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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신뢰의 길

만년필로 끄적거림....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8.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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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지방선거가 끝났다. 현 문재인정부의 집권여당인 민주당이 말하자면 지방의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민주당은 현 문정부와 함께 향후 4년간을 국정운영을 하게된다. 이번 결과는 어느 누구도 예측이 가능했다. 모 언론사는 보수측의 궤멸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각주:1] 그러나 향후 국가운영은 쉽지않을 것같다. 염려도 된다. 어느 집단이 권력을 갖는다는 것 인간에게 권력이 쥐어진다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종교가 권력의 중심에 있다거나 가지게 된다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사(韓國 敎會史)는 교회가 끊임없이 권력의 기관으로 서기위한 발버둥치는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친(親)정부적 모습도 보여주고 종교에 이데올로기가 덧붙여 선동하고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교회는 정치나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교회가 가장 귀한 가치를 내거는 복음은 이데올로기에 매어있어 어떤 정치성향에 갇혀있을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해방적이며 포괄적이며 넓은 개념이다.

필자는 인간에게 정치는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국가 운영시스템인 정치라는 것이 사실 인간의 죄로 인해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김재준은 그의 "1945년 8월 선린형제단 집회에서 강연한 기독교의 건국이념"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죄악이 없다면 관헌도 없고 국법도 없고 정치적 생활은 가정생활로부터 나와 가장 제도형태를 취할 것이며 죄악 없는 세계에서 법률의 제재 경찰제도 준비 등의 존재를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그 반면에 죄악에 무젖은 인류를 위하여 만일 국가가 없고 법이 없고 위정자도 없고 권위 있는 지배자가 없다면 그 혼선과 행악이어떠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악이 존재한 까닭에 국가와 관헌을 세웠다는 진리를 명백히 알 수 있을 것이다.[각주:2]

정치와 국가관의 존재 기초는 인간의 죄악이라는 이러한 개념은 화란의 칼빈주의(Calvinism) 신학자인 아브라함카이퍼(A. Kuyper) 의 칼빈주의 정치 라는 글에서도 맥을 같이 한다. 

참으로 죄악이 없었더라면 관리나 국가의 질서도 존재하지 않고 정치적 생활은자족생활로부터 가정제도 양식을 따라서 완전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이 존재하므로 관리를 제정했다.[각주:3]

 그런의미에서 볼때 국가의 권력, 국가의 정치 권력을 어떤 정당이나 사람에게 집중하거나 일원화 한다는 것은 실로 위험한 것이다. 정치라는 것이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개혁주의는 민주주의야 말로 가장 기독교적인 가치라고 보았으며, 한국 해방후 건국이념은 민주주의를 세울것을 요구하였다. 해방후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민주주의의 교사로 이해하였다. 민주주의는 독재라는 죄악을 방지하려는 시스템이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는 참된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평등을 기본정신으로 한다. 이러한 인간성의 회복과 평등이 복음의 정신안에 담겨있기에 교회 즉 기독교는 민주주의 교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악 때문에 이루어진 정치 시스템에 독재나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하여간 이번 6.13의 결과가 기대도 되면서 걱정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권력은 마치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악한 본성을 자극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종교가 권력의 주요 집단이 된다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다. 종교는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공간이다. 죽음과 영생, 경전과 교리는 결국 인간의 본질을 향해있다. 인간성의 회복을 다루는 종교가 권력을 가지는 것을 세속화 또는 타락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간에게 권력은 에덴동산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권력 기관에 존속해서는 안된다. 정교분리라는 명목으로 친정부적 성향을 띄어서도 안된다. 종교는 참된 인간성이 무엇인지를 설파()해줘야 한다. 그래서 초기 해방후 한국개신교는 민주주의야 말로 참된 인간성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라 믿어 민주주의의 도입을 외쳤으나 해방후에 개신교는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반공주의의 기수가 되어 버렸다. 

교회의 역사속에 나타난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제주 4.3사건의 주동자인 서북청년단의 주요 폭력적인 반공정신이 한국교회에서 나왔다.라는 입장은 필자도 좀더 연구와 분석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나 완강하게 거부할수 없는 이유도 있다.  또한 해방후의 이승만정부와 함께 권력의 중심부였던 한국교회는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인해 거짓이 드러나고 4.19민주항쟁이 터지면서 몰락하게 되었다. 이미 권력을 맛본 종교는 본질을 잃어간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였지만, 박정희 정권이 쿠데다로 성공하고 교회는 맛 본 정치 권력을 다시 회복하고자 권력의 중심에 끊임없는 러브콜을 한다. 그중에 하나가 1968년부터 연례행사로 시작된 '대통령(국가)조찬기도회'가 아니었나 싶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습을 김삼웅은 신사참배에 이은 독재자 조찬기도회 사건으로 규정한다[각주:4] 물론 한국교회는 1970년대 한일굴욕외교협정 반대운동과 삼선개헌 반대운동을 통해서 인권과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해내려고 노력했던 시기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한국교회는 강한 '정경유착적 성향'을 보였다.  

유신정부의 개발독재와 맥을 같이하여 한국교회는 성장을 이루게 되었고 실용적이며 시장경제원칙이 교회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교회의 본질이 심각하게 훼손되기 시작한것이다. 이는 종교가 권력 기관이 되면서 얼마나 그 가치와 본질을 잃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는 권력을 가지면 안된다. 교회사는 우리들에게 종교가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타락의 길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한국교회사 뿐이겠는가? 서양세계교회사에 등장하는 부흥운동, 교회가 교회 다운 모습은 권력과 상관이 없을 때에 일어났다.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으로 교회사에서 교회가 교회다웠던 시기를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이전 교회 박해시기 그리고 16~17세기 종교개혁 이라고 본다. 교회는 권력과 상관없었던 시기 아니 오히려 타락과 박해의 시기에서 본질을 위한 도약을 시작한다. 

종교는 죽음과 잇닿아있을 때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을때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이 생긴다. 권력의 중심에서 종교는 하나님나라를 바라보지않는다. 필자는 17세기 청교도 종교개혁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많다. 종교의 자유와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들이 벌인 노력은 결국 제도의 개혁까지 이른다. 이들은 1628년 찰스 1세의 권리청원과 영국 의회해산 그리고 결국 1649년 찰스 1세를 처형하면서 공화정이 시작되며 권력을 장악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법을 개혁하고 종교적 관용정책, 통치의 분권화를 내세우며 이들은 이상적 청교도적 국가를 세우려하지만 권력의 중심에 있는 교회는 결국 타락하고 시민들의 지지를 잃은 청교도 개혁은 실패하게 된다. 

존 무어만(John R. H. Moorman) 성공회 주교는 그의 책 "A History of the Church in England"에서 로마 가톨릭은 잉글랜드 교회를 무너뜨리고 교황의 지배권을 회복하려고 한데 반해서 청교도들은 잉글랜드 교회를 그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교회로 변화시키고자 했으며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는 정치적의도가 없었다고 밝히고있다고 언급하면서 그들은 처음에는 순수한 교회를 세우기위한 운동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정치적인 운동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사상이라는 내적경건운동으로 바뀌게 되는데 청교도들이 결국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은 변화되었다. 그러나 이 대각성운동마저도 국가의 중심부로 들어가게 되면서 결국 미국의 복음주의 우파로 자리잡게 되었다. 말도안되는 대통령을 세우는데 일조하였다.[각주:5]   

우리는 교회가 세상의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밀려나는 현상에 대해서 가끔씩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의 능력은 거기서 나온다. 교회의 능력은 세상에 만연한 죄와 죽음의 문제를 부활의 소망으로 이끌어낼때 권력이 아니라 일상에서 복음을 살때 나타난다. 씨알 함석헌 선생은 그의 주옥같은 책인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있는가?"에서 자꾸만 중심부에 들어가려고 하는 교회, 교회탑을 늘리고 건물을 세우는 데에서 능력이 있다고 믿는 교회에게 이렇게 말하고있다. 

교회탑이 삼대같이 자꾸만 늘어가는 것은 반드시 좋은 현상은 아니다........(중략).....이러한 교회의 증상은 고혈압이라 진단할수 밖에 없다. 뚱뚱하고 혈색은 좋고 손발이 뜨끈한 듯하나 그것이 정말 건강일까? 일찌기 노쇠하는 현상 아닌가 그렇기에 이렇게 혼란해 가는 사회를 보고도 아무 용기를 내지 못한다. [각주:6]

교회가 늘어가는 것이 건강함의 표지라고 믿거나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가는 것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능력의 표지라고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고혈압증상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노쇠해가는 현상이라고 일침한다. 그의 예언자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시사인의 2009.9.7자 주진우기자의 "한국교회 예수를 버리고 권력을 탐하다." 라는 글을 보면 교회는  한국 개신교는 권력의 한 축이 되어 군림하는 종교가 되었고, 대형 교회를 지향하는 부자들의 종교가 되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특별히 그의 글에서 마음에 와닿은 글귀가 있어서 올려본다.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1821 ~ 1881) 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발췌한 글이다.   

 "예수께서 거리에 나타났다. 예수는 병자를 치유하고 고통과 슬픔에 빠져 있는 자를 위로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찾았다. 그들은 예수 주위에 모여 말씀을 듣고 은총을 받고 있었다. 소문은 주교에게도 들렸다. 주교는 예수를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골목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화를 내면서 말했다. '주님, 왜 이렇게 나타나셔서 우리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이 땅은 우리에게 맡겼으니 간섭하지 마시고, 당장 천국으로 돌아가십시오.'"[각주:7]

예수는 병자를 치유하고 고통과 슬픔에 빠져있는 자를 위로한다. 교회는 예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할 대리자들이다. 그분의 몸으로서 예수께서 하셨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그일들을 감내해 내야한다. 복음의 실천이라고 할수 있다. 복음의 실천하니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drich Nietzsche)에게 귀를 기울이는 시도를 하고자 한다. 

기독교도를 다른 교도와 구별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도는 행동하는 것이며 그 행동이 다르기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다....(중략)...구세주의 삶이란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삶의 실천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신적이고,''복되고,' '복음적이고' 언제나 '신의 아들'로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회개도 용서를 비는 기도도 신에게 이르는 길은 아니다 오직 복음적인 실천만이 신에게로 인도하며 그 실천이 바로 신인 것이다. [각주:8]

이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그가 산방식대로 가르친 방식대로 죽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가 인류에게 남긴것은 바로 실천이었다.[각주:9]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니체는 복음의 실천만이 신에게 나아가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원문에서 복음의 실천을 어떤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있다. 니체는 복음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이 구세주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니체도 도스토예프스키도 오늘날의 시대도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대로 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복음적 실천만이 교회가 감당해야할 것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복음의 실천은 사랑이며 영혼을 위한 것 아닐까....기독교는 죽음과 연결되어 있을때 본래의 능력을 발휘한다. 살기위한 발버둥이나 인간적인 모든 노력은 모두 헛것이라고 여기는 종교이다. 권력의 중심에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종교요. 시장경쟁체제가 어울리지 않는 종교이다.  

교회가 회복해야할 것은 무엇일까? 그렇다고 정치참여와 사회의 현상을 나몰라라하며 세상을 등지며 살라고 할수 없는 노릇이기도하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정복해야할 대상 비슷하게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여겨도 안될것이다. 복음의 실천이란, 성육신적 삶의 모습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내려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복음의 실천을 다시한번 고민해 봐야한다. 중심부를 넘어 주변부로, 일상으로 나아가야한다. 하나님나라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며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자라고 크게 부푸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뜻이며 보이는 것이다. 그게 교회다.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는 것이 영향력이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생명력을 지닌 존재 그것이 하나님 나라요 교회다. 이제 교회가 복음의 실천을 위한 적나라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것같다.  

  1. http://news.joins.com/article/22718198 [본문으로]
  2. 김재준, “기독교의건국이념,” 160. [본문으로]
  3. A. Kuyper, “Het Calvinisme” (Amsterdam, 1898), 70. [본문으로]
  4. 김삼웅,"사건으로본 한국의 종교 -신사참배 이은 독재자 조찬기도회 사건" <종교신문>2004.9.21. [본문으로]
  5. 미국 보수층의 핵심이자 뿌리이면서 '미국의 주인'임을 자부하는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도 사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19일(현지시간) 여론조사 기관인 공공종교연구소(PRRI)가 밝혔다. PRRI가 지난달 14~25일 전국 성인 남녀 2천20명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표본오차 ±2.6%p)에 따르면, 자신을 백인 복음주의자라고 밝힌 응답자의 75%가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나온 트럼프 대통령의 전체 지지율 42%보다 무려 33%포인트나 높은 수치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4/20/0200000000AKR20180420002200071.HTML?input=1179m. 문화와 선교 연구원, http://www.cricum.org/1255 [본문으로]
  6. 함석헌,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있는가?,46-7. [본문으로]
  7. 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5202. 에서 인용. [본문으로]
  8. Fridrich Nietzsche,dre Antichrist, 두행숙역, "안티크리스트,68-9. [본문으로]
  9. 니체,위의책 5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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