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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책과 삶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읽고 2.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6.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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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 Mcknight. 김광남역. "Kingdom Conspiracy."

『하나님나라의 비밀』. 새물결플러스.2016.

 

지난 번에 이어서 하나님나라의 비밀에 대한 고민도 담고 요약도 하고 공부도 하고자 한다.

 

8장의 내용은 흥미롭게 진행이 된다. 전체 내용을 쭈욱 보면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하나님 그분이 다스리는 곳은 왕의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그분의 나라의 성격을 알려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칭호에 대한 성격을 살펴볼것을 제안한다.

 

특별히 저자는 바르트가 '하나님나라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다스리신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했다는 사실에 기인하여 우리가 에수를 부르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들, 즉 그에 대한 칭호들이 그의 나라가 어떠함을 결정한다고 하였다.(231-2)

 

예수님을 향한 칭호들을 안다는 것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할까? 

어떤칭호는 예수를 해석하고 더불어 하나님나라에 관한 무언가를 드러내며 예수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규정한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어떤 분으로 부르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달라질수 있을뿐아니라 공동체의 성격도 달라질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과연 나는 예수를 어떤 분으로 인식하고 부르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신앙하고 있는가? 조심스럽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먼저, 인자칭호에 대해서 둘째, 하나님의 아들 칭호에 관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즉 메시아 칭호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먼저 인자 칭호는 세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첫째, 인간을 의미하는 칭호라는 것이다. 둘째, 자신을 고난 받는 자로 묘사할때 나타난다. 셋째, 자신의 고양된 지위및 재림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을 인자라고 칭한다. 

 

즉 이 인자라는 세가지 칭호는 결국 다니엘 7장을 통하여 해석이 가능하다. 7장에보면 다니엘은 인자같은 이가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 앞에 들림을 받게되며 그 인자가 나라를 다스리게 될것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이에 저자는 결국 "예수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인자라는 용어를 택한 것은, 그것이 그의 고난과 신원을 그의 통치에 대한 소명과 연결시켜주기 때문이다." 라고 결론을 내린다.   

 

둘째로, 하나님의 아들의 칭호에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칭호가 사용될때,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는 복음서를 관찰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의 적대자들이 자주 했다는 말에 집중한다. 

 

셋째로, 메시아 칭호에 관련된 것이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를 메시아 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다른이들과 동일하게 죽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죽었다가 부활해 모든 통치자들보다 높은 자리에 오른후에야 비로소 다스리게 될것이며 그 예수가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알린다. 

 

저자는 세가지의 메시아 칭호를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의해 결정되므로, 우리가 강조해야할 것은 예수 자신 즉 세상의 구원 곧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를 위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고 완성하는 그리고 유보하거나 빼는 일 없이 온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수 자신이고 그의 삶과 말과 일과 수난과 죽음이다라고 밝힌다. (244) 

 

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성품에 대한 묵상보단....사역이 앞서는 경우를 본다. 저자는 복음전도의 핵심적인 질문은 예수는 누구인가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 질문에 대해서 그들이 하는 말이 그들의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고 확신한다.  

 

저자의 확신에 정말 동의한다. 예수는 누구신가?

우리가 아니...내가 정확하게 잊고 살아온 질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때때로 우리는 사명이 먼저요 전도대상자가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예수는 누구신가?' 라는 질문이 먼저이며 이 질문이 우리의 삶과 방향을 이끌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그 길 걷는다. 좁은 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를 비롯하여 오늘날의 교회는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궁금하다.

예수 그 자신인가? 우리는 아마 그렇다고 할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 관심이 많다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많은 사역들을 한다고 자랑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이 예수를 알기 위해서 힘쓰는가? 설교 강단에서 들려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부활과 그 나라에 관한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말과 일에 관하여 관심이 있는가? 일전에 스캇 맥나이트의 책 『왕의 복음』을 읽은 적있다. 

복음 전도에 대해서 이렇게 꼬집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가? 영접시켜 교회의 일원이 되게하는가? 

 

우리는 적잖은 경우에 그 나라의 확장 보단 교회의 확장에 힘쓴다. 주객이 전도된것이다. 그나라의 확장이 교회의 확장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좋겠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확장을 하나님나라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거룩한 백성들이 여기저기 정의와 공의를 심어내고 열매를 맺는 거룩한 시도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채 교회의 건물과 정치와 조직의 확장을 생각한다. 그래서 부흥이라는 고귀한 단어를 교인수 내지는 헌금액수증폭에 사용한다.  

어쩌면 예수를 영접하려는 시도 자체야 말로 예수를 전하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예수를 전할때 영접하게 되고 천국백성되게 하는 과정, 동감한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예수를 어떤분이신지 알고 전하는가는 우리의 삶의 양태가 어떤지 보면 알수 있다.  

 

맥나이트가 말한데로 그나라의 성격은 왕의 성격에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구의 다스리심 누구를 힘써 알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향과 우리의 삶의 태도가 달라지며 교회의 방향도 달라질것이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예수를 알고 예수를 정말 전하며 예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고민이 된다. 진지하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점차 글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성육신적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며 우리를 이끈다.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성육신적이다. 성육신은 무엇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완전하게 하나가 되기 위해 우리의 상황속으로 존재론적으로 들어오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상황속으로 들어가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나라의 상황으로 들어갈수 있을때, 우리는 성육신을 모방하는 것이다. 우리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가신 곳으로 가고자 하는 인간적인 시도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가리를 바라시는 곳을 전할수 있다."(249-50)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성육신적이라는 것을 말하며 교회역시 성육신적 사명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니 본서는 교회의 성육신적 모델을 꿈꾸는 선교적 교회론을 지향한다고 느낀다.

 

선교적인 교회 공동체 안에 작동하고 있는 네가지 성육신적 선교적 실천 사항들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네가지가 현재 교회론을 고민하는 필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1. 고립에서 급진적 환대를 지향하는 공동체로

2. 동질성에서 문화를 공유하는 삶을 지향하는 다양성으로

3 박애에서 가장 작은 자를 위한 정의를 추구하는 교제로

4. 우상숭배와의 대결로부터 그리스도안에서 누리는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회개로...

 

급진적 환대, 다양성, 정의를 추구하는 교제, 회개 이상 네가지 선교적 교회의 키워드는 내 마음에 깊은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네가지 키워드를 내삶속에 어떻게 실현시켜나가야 할지 고민이 된다. 급진적 환대를 위해서 내가 준비되어져야 할것은 무엇인가?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소외된 이웃들을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상숭배와의 대결이 아니라 회심을 불러 일으키는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이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필자를 위해 성육신적 삶이 무엇인지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는데, 성육신이란, 생명을 초래하기 위해 죽는 것 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성육신적인데 바로 우리가 다른 사람이 살수 있도록 우리의 자아에 대해서 죽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그런 삶... 우리의 목숨을 건 사명을 감당할수 있을까?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이다.

 

부활신앙은 다름아니라 현실에서 삶을 살아내는 실제적 신앙이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땅의 것에 매어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땅에 것에 매어 사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우리안에 있는 죽음과 어두움의 권세를 몰아내셨다. 그리고 죽으실 뿐아니라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현실에서 부단히 땅에 것이 집착하며 살지 않는다는 뜻이며 죽음의 두려움 속에 살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성육신적이며 선교적 삶을 살아내는 삶을 산다.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로날드 사이더(Ronald James Sider)의 인터뷰 내용을 보았다.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의와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어떻게 싸워왔는지, 또 왜그렇게 힘겹게 싸워가는지에 대해서 질문하였고 대답을 들었다.

 

그의 대답의 말미에 이렇게 말을 마쳤다.

 

“무엇이 당신을 계속 나아가도록 만드는가?”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저의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의 부활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했고, 부활함으로써 그것이 사실임을 확증했습니다. 그분의 삶과 죽음, 부활에서 시작된 메시아 왕국은 현재 진행 중이며 그가 다시 오시는 날 완전해질 것입니다.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세상의 모든 불의, 억압, 전쟁, 심지어 죽음조차 존재를 잃을 겁니다. 고통에 신음하는 피조세계는 흠없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샬롬이 마침내 온 세상을 통치할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가 가고 있는 방향이며 그 결국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있다고 확신합니다.

단기적으로는 악이, 그것도 아주 끔찍한 악이 이 세상에서 번성하겠지요. 정의와 평화와 온전함을 추구하려는 우리의 한정된 노력은 때로는 성공하지만 때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 최후 결정권이 있기 때문에 최악의 때에도, 심지어 사회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을지라도 저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를 멈추지 않게 하는 원동력입니다.[각주:1]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부활을 믿기에 그길을 걸어가는 삶을 살고 싶다.

지금 이곳에서라도 하나님나라가 되는 삶을 사는 것, 놓치지 않고 싶다.

성육신적 삶을 참으로 실현하는 그리스도인 되고 싶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를 만나고 싶다. 오늘 스캇 맥나이트 책이 귀한 명료하면서 고민을 안겨주는 인싸이트를 전해주었다. 감사하다.

  1. <레드레터 크리스천> 심연수, "한 길 가는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자 로날드 사이더," 2015년 02월 24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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