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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따라 (교회와 공동체)/공동체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와 존 하워드 요더(John. H. Yoder)의 교회윤리에 대한 정리...(교회개혁을 향한 교회윤리)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1.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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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시점 보다도 교회개혁에 대한 부담이 올라오고 있는 이시점에서 과연 교회는 어떤 책임을 느껴야 하고 어떻게 개혁을 외쳐야하는가? 에대한 고민들과 대안들이 하나씩 나오고 있다. 

 필자가 느끼기에 교회 개혁의 큰 두가지 정신은 아무래도 정복으로 이루어지는 '변혁의 원리'이냐? 아니면 '평화의 원리'이냐? 솔직히 지금까지 교회의 개혁은 변혁의 원리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볼수있다.
변혁자이신 그리스도를 내새워 각 사회와 문화속에 영향력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고자 했고, 그결과로
정치와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다시말해서 교회는 힘을 얻게 된것이다. 그러나 정복하고 다스림에 몰두한 나머지 예수님의 진정한 기독교적인 정신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리게 되었다. 이 글을 통해서 니버와 요더라는 두 기독교 윤리학자를 소개하고 싶다.
두 윤리학자간에 의견들을 남름대로 줄이고 한국교회안에 개혁에 필요한 윤리적 정신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개혁주의 교회의 토대를 이루는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의 ‘상관주의와 책임 교회윤리’와  ‘그리스도와 문화’ 를 정리하여 개혁주의가 지향했던 교회윤리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하며, 재세례파의 대표적인 윤리학자인 존 하워드 요더(John. H. Yoder)의 ‘평화주의적 교회윤리’에 대해서 짧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글은 사실 두학자를 향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요약 정리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말해서 짜집기글이라고 볼수있다. '티스토리 각주 다는 법' 아직 연구중이다. 과감하게 생략하도록 하겠다.


 니버(H. Richard Niebuhr)와 존 하워드 요더(John. H. Yoder)의 교회윤리에 대한 정리...
(교회개혁을 향한 교회윤리)


(1)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의 상관주의와 책임

 

본 글에서는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의 책을 원서로 직접 연구한 것은 아니다. 다만 김철영교수의 『믿음과 삶의 윤리학』과 현대 개혁주의 교회 유형론에 큰 공헌을 했던 『그리스도와 문화』를 통해서 니버의 교회관과 윤리학을 설명할 것이다.

우선 리차드 니버(이하 ‘니버’)에 대한 소개는 지면상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고, 교회의 윤리적인 고민을 들어가기 전에 교회에 대한 올바른 정의 없이 교회의 존재와 사역의 의미를 바로 정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므로 먼저 필자는 니버가 말한 교회란 무엇인지 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니버는 교회를 어떻게 정의 했는가?

니버는 그의 책 “교회의 사명과 사역” 이라는 책에서 교회의 정의가 현대 신학의 중요한 관심사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그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면에서 더욱 그 필요성이 요청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교회의 바른 이해가 교회의 정체성의 확립에서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노력들은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깊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그의 서론의 많은 부분은 ‘그리스도의 정의에 관하여’ 에 할애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정의하는 문제는 곧 교회를 정의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니버는 성서적이고 실제적인 면에서 교회는 하나님을 향해 계신 공동체의 중심이신 예수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으며 삼위 일체되신 신의 본질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를 공동체로 볼것이냐 제도로 볼것이냐 하는 것이다. 니버는 이같은 질문에 제도없는 공동체, 공동체 없는 제도는 존재할 수 없으며 양자는 상호보완적이라고 본다.

니버의 교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니버는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증거시키는데 있다고 본다. 이사랑은 올바른 믿음에 기초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을 향해 지향하는 자세는 어때야 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뜻인가? 니버는 교회는 세상과 맞대어(via-a-vis) 행동하는 가운데 살면서 그 자체를 규정짓는 다고 보았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이 계신 교회의 상대방 (object of the church)아니라 동료(companion)이며, 교회가 하나님의 존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있는 공동체인 것이다. 물론 세상이 때로는 교회의 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공동체이거나 하나님을 알고도 예배하지 않는 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오신곳이고,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공동체이다. 세상이 교회의 적이 되기도 하고 파트너가 되기도 하는 이와같은 관계는 무한히 가변적이다

 

a. 니버의 그리스도 유형론

그렇다면 니버는 기독교와 문화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의 책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문화와의 관계에서 서론의 많은 부분을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는 문화에 대해서 문화는 언어, 습관, 신념, 관습, 사회조직, 전해 내려온 인공물, 기술적 과정, 가치 등으로 구성된다. 바로 이런 ‘사회적 유산’ 바로 이런 ‘독특한 현실’이 우리가 문화라고 부를 때 의미하는 것인데 신약성경 기자들이 ‘이세상’을 거론할 때 염두해 둔것이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여기에 속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말한느 이른바 문화라는 것이 곧 이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문화에서 분리되어서 산다는 것은 이해할수 없는 것이다. 문화와 사회적인 실존은 뗄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니버는 문화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토론해 나감에 있어서 가능한 관계를 소위 그의 그리스도와 문화의 유형론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니버의 그리스도 유형론을 살펴보기 전에 니버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에 의해 변혁된 문화에 많은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첫째로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의 유형이다.
니버는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의 유형의 초기 기독교의 최대의 대표자로서 터툴리안을 꼽는다. 그리고 톨스토이를 대표적인 인물로 제시해주고 있다. 이유형의 특징은 예수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살고 있지만, 분명한 구분선을 그어 놓아 문화가 요구하는 모든 것 대적하는 자세를 가진 유형이다. 이런 유형의 공동체로서 수도원주의와 소수의 매노파, 여호와의 증인들을 꼽을수 있는데, 이들은 문화안에는 죄가 가득하며 기독교인이 세상으로부터 분리하는 이유는 거룩한 공동체를 부패에서 보존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니버는 이 유형의 반문화적인 입장에 대해서 ‘불가피하다’고 판단한다.

“문화의 문제에 대한 극단적 기독교인들의 해답은 과거에 있어서 필요했던 것과 같이 지금도 확실히 필요하다. 이것은 그 자체를 위해서 필요하다 만일 그것을 제거한다면 다른 해답을 제공하는 기독교인 그룹이 균형을 잃고 말겠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권위가 문화의 권위에 관계되는 점이 이러하므로 모든 기독교인이 흔히 이세상과 이세상 나라들의 잠다성과 잠정성, 그들의 이해관계에서의 타협행동, 그들의 현생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생기는 압박감등을 단연 배격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명령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니버는 또한 이 입자에 대해서 부적절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인간이 과연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할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며, 인간은 문화를 멀리 동떨어져 있는 외부적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유형에 대해서 D.A 카슨(Carson)은 이러한 니버의 의견을 가지고 문화를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아무리 급진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은 불가피하게 그 문화를 이용하는 행동에 대해서 말하며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 우리는 그리스도를 고백할 때도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언어는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심지어 ‘그리스도’와 ‘로고스’와 ‘사랑’같은 말들도 그렇다. 심지어 터툴리안이 중용과 인내를 권장할 때도 그는 스토아 철학에 일부 빚을 지고 있다” 그러므로 니버는 이 유형을 일관성 없는 것으로 평가하며, 문화에 대한 오해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둘째 유형은 문화의 그리스도 유형이다. 즉 영지주의와 아벨라르에 있어서 문화와의 조화에 관한 유형이다. 그리스도를 자신이 속한 사회의 메시아로, 즉 사회에서 최고의 희망과 영감을 채워줄 메시아로 맞이하는 공동체의 유형이다. 이들은 교회와 세상, 사회법과 복음, 은혜의 작용과 인간의 노력, 구원의 윤리와 사회적 보존 또는 진보의 윤리등과의 사이에 있어서 그렇게 큰 긴장을 느끼지 않고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문화를 해석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들에게 있어서 위대한 윤리적 교사이며, 문화의 스승으로 여겨지며 더 나아가서는 대중의 행복을 위한 열정에 불타는 개혁자등으로 제시한다. 니버는 이러한 문화적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이들은 정통 그리스도인들의 공격뿐 아니라 외부인들로부터도 반대를 받고있다고 말하고 있다. 니버는 아무리 그리스도를 문화에 적응시키려고 애써도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거침돌을 온전히 제거할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적 기독교 인들도 다른 모든 기독교인이 부딪히는 한계선, 즉 ‘세상’과 싸우느냐, 세상과 짝하느냐 하는 결단점에 봉착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서 그들의 한계를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적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은 삼위일체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영지주의 자들은 삼위이상의 더 많은 수를 요구했고, 자유주의자들은 더 적은 수를 요구했다. 이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다 예수를 인간안에서 일하는 내재적, 신적 정신과 일치시키려 한다.”

세 번째 유형은 문화위에 있는 그리스도 유형이다. 중립적인 교회유형으로서 니버는 교회역사에서 그리스도인의 대다수가 이 유형을 취한다고 이해한다.

이유형의 공통된 입장은 자연은 선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올바로 정돈하신 것이며 예수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에게 복종하셨고 또 이 하나님과 분리할수 없도록 연합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 신념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그리스도와 세상이 단순히 서로 대립되어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문화로서의 ‘세상’은 하나님없는 영역이라고만 볼수도 없다. 즉 문화란 적어도 자연으로서의 ‘세상’위에 건설된 것이기 때문에 자연의 창조주요 통치자이신 이에 의해서 긍정되지 않고서는 존재할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그 본성으로 볼 때 하나님에게 복종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복종은 인간의 구체적 현실 생활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요청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이 중심에 있는 교회는 세가지 그룹으로 나누어 지는데, 종합론자, 이원론자, 개종론자로 나눌수 있다. 이대목에서 니버는 종합론자들에게 집중한다. 이들은 둘다의 해결 방식을 추구한다. 문화와 그리스도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유지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순교자 저스틴을 꼽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를 꼽을수 있다.

이들의 문제점에 대해 니버는 이들의 기획은 저절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문화를, 은총과 공로를,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을,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모든 것을 단일 시스템에 넣으려는 노력은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고, 무한한 것을 유한한 것으로 축소하고, 그리고 역동적인 것을 물질화 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은 인간의 행위에 내포된 근본악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네 번째 유형으로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로서 이원론자들의 신학이 있다.

이원론자들에게 인생의 근본적인 쟁점은 그리스도인들과 이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세상 사이에 그어 놓아야하는 선이 아니라 하나님과 모든 인간 사이에 또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그어 놓아야하는 선이다.” 이 유형의 입장은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과 비슷하다. 그러나 대립유형은 그들과 우리 사이의 구별은 가장 강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이원론적인 입장은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자들이며, 모두 죄인들이다. “인간의 문화는 타락했다.” -그리고 인간 문화는 인간의 모든 일을 포함한다. 교회밖에 있는 인간의 업적만이 아니라 교회안에 있는 것도 포함한다. 교회 밖에 있는 인간의 업적만이 아니라 교회안에 있는 것도 포함한다. 인간의 업적이라는 점에서는 철학 뿐만 아니라 신학도 포함한다. 유대 법에 대한 유대의 변론 뿐만아니라 기독교적 가르침에 대한 기독교 변론까지도 포함한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와 문화의 양자가 이중성(the duality)을 갖고 불가피적인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양자간의 상반성(the opposition)도 긍정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긴장은 무엇인가 우리는 문화속에 있어서 거기서 우리는 빠저 나올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문화속에서 우리를 지탱해 가시며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알고 있으며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단 하순간도 존재할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래서 이원론자들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들은 기독교와 문화에 대해서 해방적이며, 두 부분에서 활기를 찾게 했으며, 무사(disinterestedness)의 정신을 가져옴으로서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이웃에 봉사하는 것인가? 그 주어진 상황이란 참으로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 반면에 이원론은 기독교인을 반 율법주의(도덕률 폐기론)로 인도하며, 동시에 문화적으로 보수주의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유형으로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다. 이것은 “문화위의 그리스도”유형의 세 번째 하위 범주다. 다른 둘은 종합론과 이원론이며 이것은 개변론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개종론자들의 이해는 이원론자와 가장 가깝다. 그러나 그밖에 중요한 다른 기독교인들의 태도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마태복음과 야고보서로부터 시작해서 바울 서신을거쳐 제4복음서에 이른다든지 터툴리안으로부터 영지주의자들, 그리고 클레멘트에서.....에 이르러 본다면 개변주의자는 뚜렷한 독자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 볼수 있을 것이다...... 개변론자가 이원론자로부터 구별되는 요점은 그들이 이원론자 보다도 문화에 대하는 태도가 더 적극적이며 희망적이라는 점이다.

이런 그들의 자세는 먼저 창조에 무게를 둔다. 이것은 이원론자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행동의 무대장치로 생각하는 것과는 구분된 것이다. 개변론자들의 창조는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하는 영역이다. 두 번째로 이원론자들은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보았지만, 개변론자들은 타락은 정신적이며 인격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 번째로 개변론자들은 역사가 근본적으로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건들의 과정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의 극적인 상호 행동에서 생긱는 것이므로 역사안에서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지 하실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역사관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역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과 그에대한 인간의 반응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의 그리스도인된 형제들과 비교했을 때 개변론자는 ‘중간기’에 산다는 생각은 다소 약하고 신적인 ‘현재’에 산다는 생각은 다소 강하다 종말론적 미래가 그에게는종말론적 현재가 되었다. 니버는 이러한 정신을 제4복음서에서 발견하고 있다.


니버는 이유형에서 그리스도를 문화의 변혁자로 소개하고 있다.

“ 그리스도는 문화의 변혁자이다. 그뜻은 그리스도가 인간 생활의 방향을 전환시키고 다시 생기를 불어넣으며 거듭나게 한다는데 있다. 그 인간생활이란.... 본래는 선한 본성을 가진 것이었으나 현재는 사실상 전도되고 부패한 것이요, 그부패 때문에 저주아래 있는 것이며, 그저주는 외부로부터 가해진 벌이라기 보다 자기 모순에서 오는 것이라 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각자의 문화와 사회 안에서 인간을 변혁시키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어거스틴으로부터 칼뱅에서 명료하게 주장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러한 칼뱅의 개변론적인 주장은 복음이 현재의 모든 생활에 침투되게 하려는 의도는 루터보다도 강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각자의 직업활동에서 그의 믿음과 사랑을 표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수 있다는 그의 보다 역동적인 직업관과 국가관, 교리관을 보아서도 이모든 것은 그로 하여금 복음의 약속과 가능성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이어서 인류의 본성과 문화를 변혁시켜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을 가진 하나님나라로 되게 할수 있나는 사상을 가지게 했다

놀랍게도 니버는 마지막 유형에 대해서는 비평을 하지 않고 있다. 물론 다섯가지 유형들 모두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대부분 니버가 이 유형을 승인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에 장신대 김철영교수는 그의 저서『믿음과 삶의 윤리학』에서 평가하기를 “니버는 물론 이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어떤 특정한 입장을 결론 짓고자 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곧 기독교의 대답지아로 말할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버가 반복적으로 논증하고 있는 글속에서 우리는 변형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방법에 관한 일련의 관계를 그의 도덕적 입장에서 ‘책임’의 윤리적 언어와 ‘변화’의 도덕추리를 제시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변혁의 진정한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그는 분명하게 제시했다.

 

b.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평가

지금까지 우리는 니버의 상관주의와 책임 윤리학을 토대로 그의 저서 그리스도와 문화를 살펴보았다. 이 다섯가지 유형론에 대한 고찰이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친 중요한 한가지는 그의 각 유형에 대한 포괄적이며 탁월한 분석에 있다고 본다.

제임스 거스탑슨(James M, Gustafson)이 지적한대로 이 “책임적 자아‘ 개념은 니버의 신학과 윤리의 작업에 있어서 포괄적이고 일관적인 주제였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이주제는 니버로 하여금 주로성서적 및 신학적 교리로부터 윤리적 행위를 해석하려는 “윤리신학자” 라기 보다는 교회 공동체와 더불어 사회공동체의 도덕적 삶에도 관심하려는 “기독교 도덕 철학자”로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 램지(Paul Ramey)가 니버의 기독교 윤리 규범형성으로서 ‘책임성’이 “상대주의를 변혁하시는 그리스도”인지 아니면 “객관적 규범을 관계적으로 변혁하시는 그리스도”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니버는 정확히 다섯 번째의 변혁자 그리스도에 대해서 긍정적인 의견을 내세웠으며, 극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행위의 통일성을 내세워 그리스도인들에게 “문화”와 정치를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콘스탄틴주의의 사회 전략을 승인해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였다. 더불어 “문화”는 기독교가 세상과 얽히는 것을 승인해 주는 포괄적인 용어가 되어 버렸으며,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속에서 선한것과 악한 것을 분별해 낼수 있는 인식의 틀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고 나서 니버의 교회 유형론보다 더 도움이 되는 것으로 존 하워드 요더(John H. Yoder)의 유형론을 소개하고 있다.



(2) 존 하워드 요더(John H. Yoder)의 윤리학

 

존 요더는 좁게는 현대 메노나이트파의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로 재세례파의 신학과 윤리를 재탐구하고 보수하여 현대 신학계와 윤리학계에 그 입장을 재천명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으로 기독교가 사회에 대하는 방식을 다섯가지로 나눈 유형화한 리차드 니버의 고전론적 유형론에 지배되어온 신학계와 윤리학계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문화와 사회에 대한 역사적 교회들의 대응방식에 새로운 틀에 의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본 2장의 내용은 요더의 윤리학을 분석함으로 교회개혁을 윤리적인 입장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특별히 요더의 1972년 출판된 “예수정치학”을 통해서 교회 윤리학에 대한 그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a. 예수정치학

먼저 요더에게 있어서 윤리란 무엇일까? 그의 책 The Politics of Jesus에서 기독교윤리란 예쑤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예수가 직접 보여주신 그 삶을 모범으로 어떻게 닮아가고 실천할수 있는가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은 당시의 제자들과 교회들뿐만 아니라 오늘의 개인들과 교회 공동체의 사회 윤리에서도 실제적인 모델과 규범이 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요더는 윤리학이란 예수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역사의 궁극적 의미를 구현하도록 부름 받았고 또 하나님 나라를 불러 일으켜야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삶과 가르침의 결정체인 ‘십자가’를 구현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신자들은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지만, 이것이 교회 밖 사람들의 사명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윤리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이해는 정말 중요하다. 요더는 나사렛 예수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모든 삶이 정치적인 삶이고, 그 삶과 가르침들은 사회 윤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자체가 하나의 '사회윤리'라고 주장한다.

이에 고신대의 기독교 윤리학을 가르치고 있는 신원하교수는 요더가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를 당시 사회변혁의 사역자로 해석함으로서 예수의 가르침을 개인저인 삶과 영적인 면에만 관련이 있고 사회적인 문제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는 19-20세기의 서구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요더의 사회 윤리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의 윤리학의 절정은 바로 십자가라고 할수 있다. “그리스도는 아카페다. 자기를 내어주는 비저항적인 사랑이다. 십자가에서 이 비저항은 자기 방어를 위한 정치적 수단을 사용하기를 거절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죄인들의 손에서 무죄한 자가 죽어가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에서 궁극적 계씨를 발견하게 된다. 이 죽음은 하나님께서 악을 어떻게 다루시는 지를 보여준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평화주의 혹은 비저항의 유일하고도 타당한 출발점이 있다.” 요더가 사용한 비폭력적 사랑은 하나님의 용서를 가르친다. 그의 복음은 용서로 이해할수 있다. 그리고 예수의 공동체인 교회는 이 모범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

요더는 교회를 사회변혁의 정치 공동체로 이해했다. 스탠리하우어워스는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이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교회는 세상밖에 있지 않다. 세상 속 이외에 교회가 있을 자리는 없다. 교회는 세상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어떤 형태 어떤 식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세상안에 있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요더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적과 방향은 곧 예수그리스도의 규범이며, 그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았던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소수 집단의 모습으로 돌아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공동체야 말로 사회변혁의 진정한 공동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래서 요더는 세상속에 있는 교회가 취해야할 십자가 윤리의 모습을 다음 세가지의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혁명적인 복종이다. 요더에 따르면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윤리적인 교훈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동료들에게 자원함으로 복종하기를 권고 하고 있다.(엡 5:21~6:9, 골 3:18~41, 벧전 2:13~3:7) 이러한 복종의 윤리는 자신들을 정부의 지배와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예수도 역시 권세에 대항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권세에 굴복하셨지만 역설적으로 그 권세를 파하셨다. 요더는 이 복종을 혁명적인 복종이라고 한다.

둘째로 세상 경영의 거부이다. 요더는 그리스도는 역사의 물줄기를 조종하려하고 사회를 움직이려하는 존재가 아니며 역사를 움직이시고 경영하는 것은 오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요더는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정복을 의미하는 부활사건을 통하여 예수께서 지배적인 위치를 포기하시고 권세자들에게 복종한 것이 종국적으로 옳았음을, 그리고 승리하신 것임을 만천하에 천명하시고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셋째로 무력함이 수용으로서의 기독교 평화주의다. 예수의 십자가 지심은 세상의 폭력, 무력, 권세에 칼로 맞서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비웃고 힘없는 모습을 취하신 것이라 할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제자도는 예수께서 세상의 권세와 정사들의 권세와 악에 대해 힘과 악으로 대항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권세없는 자의 모습을 취하신 것 같이 무력을 포기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더는 사회정의를 확립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칼을 휘두르는 정치적 자리와 위치에 직접 관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b. 요더의 ‘평화주의 윤리학’에 대한 평가

요더의 큰 공헌이라 함은 리처드 니버의 고전적 유형론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을 통해서 니버의 유형론이후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요더는 기독교회는 그러 낡은 신학적 윤리적 관점의 틀로부터 단호히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워드 존 루웬(Howard John Loewen)교수도 역시 문화적 명련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 반드시 문화와 사회에 대한 어떤 획일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주장하면서 니버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니버의 유형론보다 요더의 교회 유형론을 소개하고 있다. 세가지 유형으로 나눌수 있는데 행동주의, 회심주의, 고백 교회유형으로 나누고 있으며 고백교회야 말로 요더가 제시한 십자가 교회의 모습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윤리학은 윤리적 분파주의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의 윤리학은 특히 그의 평화를 위해 취하는 방식에 대해서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피하라는 소극적인 방식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악의 해소와 이웃을 보호하고 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형태의 윤리적 행동을 해야할 것인지를 제시하는 데 노력해야 할것이라고 하우어워스는 제언하고 있다.

 

3. 결론: 니버와 요더의 입장을 통해 본 한국교회의 교회의 개혁

 

한국교회는 지난 1960년을 시작점으로 도시 산업화의 영향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 내었다. 그러나 더불어 한국교회의 성장위주의 신앙은 기복주의와 번영의 신학을 낳게 되었고, 신앙이 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전락 시키는 안타까움을 남겼다.

게다가 농촌과 도시할 것 없이 대형 교회의 위주의 신앙은 무미 건조한 성도들을 낳게 하였고 교회 내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초래 하였다. 힘을 가진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변혁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와 경제를 두루 간섭하였고, 오히려 사회에서는 더욱 신뢰받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교회가 언행의 일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고, 정의 실현에 있어서 그 힘을 잃어버렸다. 필자는 이시점에서 과연 교회가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진정한 변혁하는 공동체일까? 이땅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의분을 가지고 직접 사회로 나아가 개혁 하며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교회가 가진 사명일까? 그러나 정직하게 역사를 돌아보건데 그러한 외침과 부르짖음은 호전적인 교회로 만들었으며, 결국 교회가 세속화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세속권력과 교회의 권력이 하나가 되어 기독교가 문화를 지배한다는 의미로서 요더는 이를 ‘콘스탄틴주의’ 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교회가 어떻게 신뢰를 회복하며, 진정한 교회 개혁은 무엇인지 정리하고 마치고자 한다. 삶과 신앙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요더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제자의 삶에 대해서: 한국교회의 신뢰의 회복은 교회가 교회다워질때에 가능하다.

리차드 니버의 변혁자 그리스도 유형에 대한 깊은 오해중에 하나는 교회의 개혁과 변혁을 밖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심으로 교회의 개혁보다는 세상의 변혁, 문화의 기독교화를 위해서 앞장서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의 사명 중에 빠트려서는 안될 사명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교회는 교회를 먼저 개혁함으로서 교회가 교회다워 질때에 그때에 사회가 변혁될수 있다.
 장신대 임성빈교수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신앙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부르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응답은 전인적인 응답이며, 그 응답의 장은 하나님이 관계하시는 모든 영역,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으로부터 전우주적인 차원에 걸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필자가 이해한 바로는 우리의 신앙과 행동은 분리될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는 삶이기 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윤리적인 삶인가를 살펴보아야 그것이 진정한 책임 윤리학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므로 니버의 변혁자 그리스도 유형의 연구는 보다 교회를 향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교회가 신앙 공동체로서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모범을 제대로 보여준다면 가능하다. 교회란 무엇인가? 요더가 말한대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한 삶의 모범을 그대로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그것이 교회다. 이는 본회퍼도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이기 위하여 고난과 버림을 받았듯이 제자들도 제자이려면 고난과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자신을 매고 따라 나선자는 그리스도의 율법인 그의 십자가 아래서 생활한다.”

그러나 요더의 윤리학은 대단히 소극적이라는 데에 리차드 니버가 제시한 변혁자 그리스도는 충분히 보완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먼저 교회가 십자가의 삶과 모범을 그대로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삶과 동시에 이시대의 대안이되는 변혁하고 책임을 다하는 거룩한 복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가져야할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변화된 사람들 고 삶의 거룩한 도성의 시민들은 “하나님을 따라 순례자로 살면서 두려움과 욕망, 슬픔과 기쁨을 모두 겪는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바른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감정도 바르다.”

진정한 회심, 진정한 변화는 단지 개인의 신앙에서 벗어나 당연히 사회로 향하게 되어있다. 한국교회는 먼저 진정한 회개의 자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과 버림받음의 길로 마땅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이며 변혁이 아닌가.


 

둘째로, 변혁자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삶과 신앙 일치의 삶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소망하는 신앙적 삶을 살도록한다. 요더의 윤리학은 삶을 살아내는 현실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점에서 같은 메노나이트 그룹의 윤리학자인 버크 홀더(J. Lawrence Burkholder)박사는 요더의 비현실주의적 입장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에따르면 요더의 입장에 대한 주된 논란은 결국 그가 ‘딜레마의 윤리학(quandary ethics)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요더를 '상아탑’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학자로 간주하고 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도 이 악의 해소와 이웃을 보호하고 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형태의 윤리적 행동을 해야 될것인지를 제시하는데 노력해야 할것이라고 제언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십자가 정치학은 조금 현실에서 벗어난 비현실적인 감각을 준다.

구체적이 삶의 현실속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정말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하나님주권 아래에 놓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절대 비현실적인 삶이 아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 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의 주권적 질서 밖에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른바 성과 속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신앙과 경제, 정치, 문화적 삶은 결코 분리될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어느곳이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할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삶은 현실을 구체적으로 사는 삶을 말하며 또한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하우어워스는 이러한 삶을 나그네된 백성 식민지의 삶이라고 하였다. “기독교 윤리에서 종말론을 제거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예수 자신의 신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세상에 임해서 다른 모든 나라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과 치유는 하나님나라의 본성과 임재를 보여준다..... 곧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세상이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메시아 공동체의 백성이 되라고 초청하는 것이다” 이것은 리차드 니버가 말하는 부분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는 배타적 기독교의 반문화주의와 문화에 대해서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문화와 그리스도가 대립하는 유형도 역시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문화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놓여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이 하나님나라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제자도와 연결된다. 한국교회안에 하나님나라의 삶이 요구된다. 그것은 곧 제자의 삶이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것처럼 칼뱅 하나님 주권을 강조하며 제네바시를 변혁시켰던 것처럼, 윌버포스가 하나님나라의정의와 평등을 외치며 노예를 페지시켰던 것처럼 오늘날 변혁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의 삶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윤리적인 삶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이 개혁되어진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아닌가 생각된다.

참고서적

믿음과삶의윤리학 상세보기
그리스도와문화 상세보기
예수의정치학 상세보기
하나님의나그네된백성이땅에서그분의교회로살아가는길 상세보기
전쟁과정치(정의와평화를향한기독교윤리) 상세보기
교회와문화그위태로운관계리처드니버의'그리스도와문화'를재조명하? 상세보기

월간지
목회와신학(2월호)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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