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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책과 삶

기독교와 경제/ 자본주의...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7.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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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두 권을 구입했다.

브로니슬라프 게레멕의 『빈곤의 역사: 교수대인가 연민인가』(도서출판, 길)

그리고 R.H 토니의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한길사)

 

게레멕의 빈곤의 역사는 빈곤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통찰한 책이다.

이른바 시대별로 빈민은 어떤 역할을 해왔으며 사회적은 대책과 현실적인 측변에서 우리의 빈곤 해결책은 무엇인가를 들여다 보고 있다.

게레멕은 초기 중세사회에서 빈민은 종교적 개념이었다고 밝힌다.

다시말해서 빈민을 도와야할 의무는 교회가 지는 것으로서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점차 가난은 영적인 덕목이며 구걸이 정당화되었고, 이를 위해서 귀족층이나 부유한 자들의 자선운동을 장려하였고,

 이러한 자선운동은 수도원들이 부를 창출해 내는 결과가 생겼다는 것이다.

부유한 이들의 자선운동을 구원과 연결하여 신학적 개념까지 등장하였다.

결국 중세시대 기도교 사회에서 빈민의 존재는 매우 자연스럽게 신의 구원 사업의 한부분으로 자리 매겨졌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후대의 이러한 자선운동은 12~13세기에 걸쳐 기관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자선운동의 증가는 '복음주의적 각성'이라는 종교적 감정에 의해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대부분 부와 권력에 대한 반항적인 설교를 하였다.

한마디로 오늘날과 같이 부와 권력에 집착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날카로운 일침을 가해

풍요로운 삶에 대한 특별한 경계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당시의 유명 설교자들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게다가 경제개념이 종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종교가 경제 개념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유익이 있을 것같다. 게렉멕은 사회적 빈곤 현상이 종교에 미친 영향을 역사적으로 풀어보는 듯하다.

 

하여간 풍요로운 삶에 대한 경계와 빈민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자발적 가난이며 은자운동이라고 할수 있다.

자발적 가난을 주장하는 은자 운동은 기존의 수도원 주의와는 다른 형태를 가진다.

특별히 게렉멕은 자발적 가난운동이 수도원 운동과 가장 큰 차이점을 도시안에 있느냐 도시로부터 탈출하느냐 로 보았다.

자발적 가난운동은 이 운동을 주도해 갔던 은자들은 성직자들이 쌓은 부와 권력에 대한 저항 사회적 지위에 대해 저항하며 도시를 순회하며 설교하였다. 반면 수도원운동을 도시를 탈출하여 광야로 갔다.

대부분의 이들의 설교와 가르침은 말세론적인 관점이었을 것이며, 말세에 택한 사람들로서 정체성을 견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금욕적 삶을 통해서 도시와 자신의 삶의 처소에 수도원적 삶을 살아가도록 하였다.  

 

아직 읽어가기 시작하는 중이라. 뭐라고 결론짓기는 어려우나,

게레멕은 사회의 문제가 어떻게 사회와 종교의 형태를 변화시켰는가를 고찰해 보려는 것같다. 그리고 빈곤의 문제를 다룸으로서

오늘날의 빈곤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이러한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서 한 권의 책을 더 집어 들었다.

 

바로 R. H 토니의 기독교와 자본주의 발흥 이라는 책이다.  

그는 막스베버의 명저인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이 종교가 어떻게 경제문제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시도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말하자면 서양의 기독교 특별히 종교개혁의 결과로 얻어진 것들이 결국 자본주의가 발전하는데 더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즉 경제적 요인의 본질적인 중요성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토니는 그 관점을 오히려 뒤집는다. 그가 이 책을 저술한 의도는 기독교가 어떻게 경제적 요인이 되었는가 또는

경제에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가 아니라. 경제적인 팽창이 영국의 종교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를 역사적인 맥락을 살피며 기술하고 있다.

 

그러니 그는 책의 서론부터 어떻게 기독교가 세속화 되었는가를 살펴보려면, 경제관념이 세속화된 시점을 살펴보는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종교와 이러한 사회적 세속적 업무의 영역의 분계선이 오늘날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되세기며, 그 관계를 따져 나가고있다.

 

분명하는 것은 게레멕도 토니도 중세시대부터 17세기 까지 종교는 국가와 더불어 공적영역을 공유하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빈민의 문제와 같은 것들이 구원의 문제로, 청교도 주의와 군주와의 갈등이 가능한것은 이 두 영역이 공적으로 무관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니는 17세기 베스트 팔렌조약으로 인해 국가는 소위 인간의 기본권과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보존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국가와 종교는 정교분리라는 이름아래에 놓여지게 되었다고 밝힌다.

책의 서문만 읽었지만, 경제관이 어떻게 종교와 연결점이 될수 있는가? 특별히 청교도 사회와 그들의 경제관에 대한 역사적 연구도 관심이 생겼다. 특별히 미국의 청교도운동이 결국 부흥운동으로 이어지고 2차 대각성때는 찰스 피니에 의해 사회운동과 기관적 자선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의미에서 미국 청교도운동 시기 경제관념에 대해서 연구해볼만하다.

특별히 빈민과 부에 대해서 어떤 입장이었는지, 그것이 혹시 미국의 독립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종교와 국가 그리고 사회와 상관관계를 두고 고민이 많은 것같다.

종교가 사회에 미친 영향이 컸던 시기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사회가 종교에 미치는 영향이 컸던 시기도 분명히 있다.

정교분리에 대한 입장이 오늘날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지도 살펴볼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서로의 상호 존중의 의미인가? 개혁교회가 말한대로 개혁시켜야 할 입장인가. 분리라는 말이 오묘해진데에는 그 기준점이 각 시대마다

교단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보았을때, 내가 지금 읽으려는 이책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한 책은 빈곤의 역사에 대해서 빈곤의 문제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하는 지를 밝혀주며

한 책은 종교가 어떻게 사회적 문제와 세속화에 영향을 받았는가를 통해서 무엇이 진정한 종교다움인지, 이세상에서 어떻게

우리는 이 경제체제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찰해 주고 있다.

하여간 이 책 두권을 정독한후 후기를 남기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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