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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비준반대범국민운동 과 기독교.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6.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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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준반대범국민운동 촉구

조국 수호국민협의회 결성

 

31일 오전 10시 한일 협정비준반대투쟁연합체인 <조국수호국민협의회>가 서울시내 대성빌딩 강당에서 결성되었다 예비역장성성등 백명 모여 각계에 "멧세지"

 

"협약폐기 새출발하라"

 

 

 1. 국회비준저지와 협정의 폐기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

2. 정부는 국민여론에 귀를 기울여 협약을 즉시 폐기하고 국민의사를 반영하는 재출발의 자세를 취하라

3. 여야를 막론하고 당리를 초월하여 비준동의를 거부하라

4. 미국은 극동정책에 있어 다시금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권고한다

 

이렇게 4개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비준반대운동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무엇을 했을까? 동아일보 1965년 7월 2일자 신문에 보면 "권력으로 탄압말라. 목사들도 비준반대성토 나라위한 연합기도 갖기로.." 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65년 7월 1일 서울영락교회에서 한경직, 김재준, 강원룡, 강신명 등 기독교 목사 100인이 "한일회담 비준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당시 "한일 협정에 관한 국민의 애국적 의사표시를 권력을 탄압하는 행위를 즉시 중지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난 두 인물이 한경직과 김재준이었는데, 한국교회의 기장과 예장이라는 두 기둥의 중심이었던 지도자이다. 더 나아가 진보와 보수의 두 산맥이라고도 볼수있다.

이 두 지도자들이 함께 목소리를 낸것은 특이할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니 한일굴욕외교반대사건은 진보와 보수간 하나의 목소리를 낸 사건임과 동시에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라고 본다.

 

연규홍교수는 이렇게 평가한다.  

 

"장공과 추양이 1953년 기장과 예장의 교단분립후에 공식적으로 함께한 것은 1965년 한일굴욕외교반대사건이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남한의 경제재건이란 명분하에서 36년이란 민족 과거사를 몇 푼의 배상금으로 대체하였다. 이에 한국교회는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선두에 선 장공과 추양은 민족의 자주성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주장하였다. (조성기, “한경직 평전참조).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의 길은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그것은 남북분단 상황하에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다. 추양은 비록 군사독재라 할지라도 무정부주의나 공산주의보다는 낫다는 것, 즉 반공국가가 더욱 현실적이라는 목회자적 판단이었다. 그러나 장공은 진정 공산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독재체제하에서 천민자본주의를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그는 반독재 반자본주의적 입장에 섰다.

왜 이렇게 두 분의 입장이 달라졌을까? "

 

-연규홍, "한경직과 김재준, 그들의 삶과 사역에 대한 논평"-

비준반대 한경직 논설 동아 1965년 8월 5일

 동아일보의 한경직의 논설에 의하면 정치계의 여야의 의원들이 역사적 사명감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과 정치적 소통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고 있다.  본 논설을 통해서 당시 한국교회는 소통의 부재상태에 있는 국가를 상대로 어떤 역할을 했을지 궁금했다.

한국교회는 이제 비준반대이후에 삼선개헌을 중심으로 김재준과 재야의 인사들을 선두로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입장과 정교분리원칙과 반공을 외치는 입장의 두 갈래로의 극심한 분열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분열은 어쩌면 지금까지 오고 있다.

왜 교회는 분열을 선택했는지 궁금하다. 국가에 소통을 원했던 교회가 서로간의 소통의 부재 상태로 전락한 것에 대해서는 유감이다.

 

어쨰든, 7월 5 약 2천명의 교인들은 영락교회에서 구국기도회를 열어 밤새워 기도에 열기를 더한다.  사진은 동아일보 1965년 7월 6일자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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