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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복음주의 대학생선교 운동사: 기독학생회(IVF)의 선교운동사와 그 특징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2.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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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는 참고문헌으로 대신하겠다.

 

복음주의 대학생선교 운동사:

기독학생회(IVF)의 선교운동사와 그 특징

 

 

 

-목 차-

 

I. 서론

 

Ⅱ. 기독학생회(IVF)의 설립 배경과 역사

A. 영국 기독학생운동(UCCF)의 역사

 

 

1. 캠브리지 대학 기독학생연합회

    CICCU (The Cambridge Inter-Collegiate Christian Union)

2. 학생자원자 운동 (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 SVM)

3. 기독학생 운동 (The Student Christian Movement : SCM)과

    캠브리지 기독학생회 (CICCU)

4. I.V.F (Inter-Varsity Fellowship)의 배경.

 

B. 한국 기독학생회(IVF)의 역사

 

1. 초기 한국 개신교의 무디의 부흥운동과 학생자발운동(SVM)의 영향

2. 한국 IVESF의 시작과 배경

3. 한국 IVF의 성장과 열매

 

Ⅲ. 맺는 말

 

-참고문헌-

 

 

 

 

Ⅰ 서론

 

 복음주의 대학생선교운동은 각 시대마다 땅끝까지 세계 복음화를 이루고자하는 Vision에 불타는 캠퍼스 지성인들의 선교운동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청년들이 사라지고 있다. 더욱이 대학캠퍼스내에는 더 이상 대학생들의 선교적인 열정을 보기는 어려운 실정이며, 각 캠퍼스마다 캠퍼스안에 하나님나라를 세워갈 회원들이 없어서 문을 닫는 실정이다. 캠퍼스의 선교의 열정이 사라진모습은 어쩌면 미래의 한국교회의 실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실정속에 과거의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중요한일이라고 생각한다. 선교의 한 세대를 마감하고 다음 세대를 기대와 우려 속에 준비하는 지금,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삼아 보다 성숙한 한국교회의 선교를 꿈꾸며, 본 논문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역사를 살펴봐야 하는가? 특별히 한국교회는 70-80년대에 CCC, IVF, 네비게이토 등의 대학생 복음주의 선교단체를 통해서 성장했다. 그리고 당시 대학생선교단체가 출판한 서적들을 통해 제자도, 세계관, 그리스도인의 사회책임에 대한 깊은 고민이 시작되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미국 IVF의 어바나(Urbana)대회의 모델은 선교한국대회의 시작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오늘날 수많은 한국의 대학생들이 선교한국 대회를 통해서 교회와 선교에 헌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학생선교단체의 사역은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낳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쇠퇴해 가는 한국교회와 대학생 선교의 현실 속에 대학생 선교운동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과거를 재정비하고 미래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본 논문은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굵직한 역할을 했던 IVF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한국 IVF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영국 기독학생회의 역사를 살펴보며, 영국학생운동이 어떻게 한국으로 전해졌는지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기를 원한다. 그리고 한국 IVF의 역사와 특징을 살펴보는 것으로 논문을 맺고자 한다.

 

 

Ⅱ. 기독학생회(IVF)의 설립 배경과 역사

 

A. 영국 기독 학생운동의 역사

 

1. 캠브리지 대학 기독학생연합회

 

CICCU (The Cambridge Inter-Collegiate Christian Union)

 

 

a.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1759-1836년)과 학생 기도운동

 

 

       캠브리지 대학의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1759-1836년)은 캠브리지 대학 신입생 시절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된다. 졸업 후에 그는 대학내의 홀리트리니티(Holy Trinity)교회의 담임목사로 54년동안 사역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늘 그의 학생들을 자신의 숙소로 초대했고, 평생 그곳에 살면서 학생 성경공부, 기도회를 하면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강조하며 영향력을 넓혀가기 시작하였다.

 그의 설교와 교육에 영향을 받은 대학생들은 빈민가에 주일학교 ‘예수거리’(Jesus Lane,1827)를 세워 시작했고, 해외선교를 위한 성경번역기구(1811)를 설립하기도 한다.

 또한 1857년에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캠브리지에 방문하여 그가 했던 연설에 깊은 감동을 받은 두 명의 신입생 틴트링(J. Trinting)과 메이나드(A. Maynard)에 의해 시작된 매일기도모임 (The Daly Prayer Meeting)이 있는데, 이 기도모임은 많은 헌신된 증인들의 영적인 삶에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J.C 폴락(J.C. Pollock)은 그 결과로 1858년에 세워진 캠브리지 대학 교회 선교사 연합(Cambridge University Church Missionary Union)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캠브리지 대학 교회 선교사 연합(Cambridge University Church Missionary Union)은 ......기도와 신문을 읽고 선교에 지원한 선교사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자주 만남들을 가지면서 선교의 정신을 더 집중시킬 수 있었다.”

 

 이밖에도 많은 기도모임들이 대학내에서 생기기 시작했는데, 특히 옥스퍼드의 “Pray Union"(1860), 런던 대학의 메티칼 기도회(the Medical prayer Union, 1834)가 이루어짐으로 영국 대학가에 대 영적 각성 (Awakening)과 새로운 복음주의 영적 분위기가 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기도운동과 더불어 1870년대에는 비국교도들의 대학입학이 허가되면서 복음주의 학생운동이 급속히 성장할수 있는 전기를 맞게 되었다. 전체 학부생 10%에 달하는 2백여명이 해외선교에 참여하는 등 선교의 열기는 높아져갔다.

 이점에 대해서 J.E 오어(J.E. Orr)는 영국의 두문화의 중심인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바로 이 '매일 기도모임'을 통해 이뤄졌다고 했다.

 데이비드 하워드(David Howard)는 이러한 기도운동과 선교운동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IVF의 기원을 추적하면, 바로 찰스 시므온의 사역으로 바로 연결된다고 하였다.

 

“캠브리지에서 시므온의 사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중 하나는 1836년 그가 소천한 후에도 그의 정신이 길게 지속된 점이다. Simonites(그의 비공식적인 모임에 참석했던 학생들)들은 예수거리 주일학교 그리고 복음과 함께 어디든 떠나는 활동들을 지속시켰다. 또한 1848년의 캠브리지 개인기도모임이 형성되었고 이는 영적인 삶에 그리고 많은 증인들에게 영적인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요인이 되었다........각 단과대학의 기독인 연합 모임인 CICCU(The Cambridge Inter-Collegiate Christian Union)는 1877년에 형성되었다. 이 운동의 작은 모임의 시작은 곧 영국 전 대학으로 퍼져나갔다 그 후에 전 세계적로 결국에는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이같이 영국의 대학가는 찰스 시므온의 영향으로 인해 성경공부모임, 매일기도운동으로 이어졌고 이는 대학내의 영적인 부흥을 이루어냈다. 이러한 영적인 부흥은 지속적으로 대학간의 연합 모임으로 이루어졌고 이러한 연합모임의 결실로서 CICCU 와 같은 단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CICCU가 결성된 1877년부터 1900년까지는 캠브리지 대학의 학생운동은 기초를 닦는 기간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대학운동의 특징은 자발적이라는 데있다. 19세기 초에 대학을 중심으로 학생 자발적인 성격의 대학생 선교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후 학생자원자 운동 (Student Volunteer Movement : SVM)이 등장하게 된다.

 

 

2. 학생자원자 운동 (Student Volunteer Movement : SVM)

a. 건초더미기도회(The Haystack Movement)

 

 SVM을 비롯하여 북미의 선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 다음으로 사무엘 밀즈(Samuel Mills,1783-1818)에 까지 이르게 된다.

 

 1806년 매사추세츠의 윌리엄스대학에 입학한 사무엘 밀즈는 습관에 의해 늘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후에 다른 친구들과 대학근처 Hoosak River나 계곡에서에서 기도하는 것에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1806년 8월에 밀즈와 다른 네 명의 친구들은 평상시처럼 그들의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다. 피할 곳을 찾아 들어간 곳은 건초더미(Haystack)였고 건초더미아래서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들의 기도를 내어놓았다. 그들의 기도의 중점은 학생들의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과 부흥에 관한 것이었다. 밀즈는 그들의 토론을 이끌었고 그들의 선교헌신을 위해 기도를 인도 하였다.

 

 이 건초더미 기도회(The Haystack Movement)는 4년 후에 최초의 북미주 해외선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ABCFM)를 조직하게 된다. 1810년 그해 침례교 선교사 두사람, 기도회의 멤버였던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과 루터 라이스(Luther Rice)가 배를 타고 선교지로 향하게 된다. 이후 1886년에는 학생 자원자운동(SVM)이 시작된다.

교회사가 라토렛(Latourette)은 교회와 미국의 해외선교운동은 건초더미 모임으로부터 주된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b. 기독청년회(YMCA)와 신학교 동맹(Inter-Seminary Alliance)

 

 SVM운동의 태동과 관련하여는 기독 청년회(YMCA)와 신학교 동맹(Inter-Seminary Alliance)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YMCA는 1844년 6월 6일 대도시에 있는 젊은이들의 영적복지에 관심이 있던 조지 윌리암스(George Williams)에 의해 런던에서 시작하게 된다. 1851년 YMCA는 몬트리올(Montreal)과 보스톤(Boston)에 있는 북미대륙에 조직된다.

 

 이 운동의 주도적 인물 중 한사람인 위셔드 (Luther D. Wishard)는 1877년 하노버(Harnover)와 프린스턴(Princeton) 대학의 YMCA에서 활동했다. 위셔드는 대학들과 단과대학들을 포함한 전 세계적으로 대학들 간의 YMCA의 통합을 도우려고 방문을 시작했다. 그는 해외선교의 시급성과 필요성을 주장하며 YMCA의 적극적인 참여를 주장하였다. 첫 번째로 영국 그리고 독일 그리고 1889년엔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는 몇몇의 선교 대학에서 연설하였다. 그해 여름 학생 수련회가 ‘기독 학생들의 세계 대전을 위한 연합’이라는 주제로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YMCA 여름 학생 수련회는 북미에서 일제히 개최되었고, 일본 학생들은 그들의 상대국인 미국에게 ‘Make Jesus King’ 라고 세 단어를 전보를 보냈다.

 

 이 전보는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일본으로부터 미국까지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뒤에 스웨덴으로, 노르웨이와 덴마크으로 학생 컨퍼런스의 연속물로서 뒤따르게 되었다. 1895년 스웨덴의 Vadstena Castle에서 ‘세계 학생 기독 연합’(World’s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배경과 함께 절정을 달하게 된다.

 

 학생자발성운동에 영향을 준 또 한명의 인물이 있는데 바로 로버트 윌더(Robert . R. Willder)였다. 그는 선교사인 로얄 윌더 (Royal G. Willder)의 아들로서 1863년 인도에서 출생하였다. 1881년 프린스톤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1883년 가을 로버트 윌버는 그의 두 명의 친구들과 하트포드(Hartford)에서 열린 신학교 동맹(Inter-Seminary Alliance)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당시 주 강사 였던 A.J Gordon의 성령충만한 설교는 당시 참석한 학생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당시 윌더는 수련회를 통해서 프리스톤안에 흐르고 있는 두 가지의 영적 분위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대학내의 부흥을 위한 기도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것과 두 번째 학생들의 선교적 관심이 높다는 것이었다.

 

 이에 윌더는 곧바로 대학의 학생들의 선교적 정신을 고취시키고 선교 관심자들에게 선교의 정보를 제공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프린스턴 외국선교부(Princeton Foreign Mission Society)를 구성하게 된다.

 

C. 캠브리지 7인 (Cambridge Seven)

 

 1882년 미국의 복음주의자인 D.L 무디 (D. L Moody)는 영국여행기간동안 캠브리지를 방문하였다. 그 리고 무디의 캠브리지 방문에 대해서 J.C 폴락(J.C Pollock)에 의하면,

 

“무디에 의해 주어진 자극은 선교적 열정(zeal)을 촉진시켰다. 그것은 가장 뚜렷한 표징이었다. ...... 많은 무디의 회심자들은 곧바로 해외의 현장(field)으로의 부르심을 감지했다."

 

무디의 1882년의 캠브리지 전도집회는 복음주의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고 그의 방문으로 인해 선교사 지망생들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열매가 바로 캠브리지 7인(Cambridge Seven)이었다.

 

 2년후 캠브리지 7인은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통해 사역하는데 헌신하였다. 이들은 모두 부유한 집안출신의 유능한 젊은이로 모두 해외사역을 갈망했다. 그들중에는 CICCU의 대표 C.T 스터드(C.T Studd)가 포함되어있었다. 이들은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의 영향으로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로 들어가 1885년 2월 중국으로 항해를 떠났고 평생을 헌신하게 된다. 이들의 해외선교에 대한 비전과 헌신은 당시의 수많은 대학생들의 마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결과 학생 선교사 지원자연합(The Student Voluntary Missionary Union: SVMU)의 조직이 생겨난다.

1991년~2007년까지 IFES의 3대 총무로 지낸 린지 브라운(Lindsay Brown)은 캠브리지 7인의 영향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세계의 다른 곳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헌신한 수많은 젊은이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불러일으킨 영감은 학생세계를 뒤흔들었다. CICCU의 졸업생이며 리들리 홀 신학대학 학장이던 핸들리 무울(Handley Moule)은 자신의 학생들에게 모국의 필요에 대해서도 완전히 잊지는 말 것을 당부해야 할 정도였다”

 

 

d. 헐몬산 집회와 SVM 설립

 

 

1886년 학생 집회는 YMCA와 위셔드 (Luther D. Wishard)의 열정적인 후원아래 헐몬산 (Mt.Hermon)에서 열렸다 주강사는 메사추세츠의 무디 (D. L Moody)였다 위셔드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여러 대학을 방문하여 이 집회를 알렸다. 특히 이 집회에 참석한 프린스톤의 윌더 (Wilder)는 헐몬산 집회를 통해 선교의 열매가 구체적으로 현실화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우리 기도가 헐몬산 집회에서 응답되어 전 대학으로 기도모임이 파급될 것이고 선교사 지원자 100명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회가 폐회하기 전에 250명의 학생 중 100명(모트(Mott)를 포함하여)이 외국 선교사로 자신을 헌신하였다.

 

"이 집회의 나머지 기간 동안 해외 선교에 지원한 학생들은 매일 밤마다 모여 기도했다. 마지막 날까지 99명이 그 헌장에 서명했는데 그날 저녁 기도회를 위해 모였을 때 한 학생이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와 그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로버트 윌더는 프린스톤으로 돌아와 그의 여동생 그레이스(Grace)에게 큰 기쁨으로 그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대해서 말하였다.”

 

 윌더(Wilder)는 곧 미국과 캐나다의 대학, 신학교 탐방을 시작하였고 200명의 넘는 자원자들을 등록시켰다. 1886-87년 1년동안 학기중에 윌더와 포먼(Forman)은 미국과 캐나다의 162개 대학과 신학교를 방문하여 해외 선교를 위해 학생들이 자원 해줄것을 호소하기 위해 여행을 하였고 그해 말 500명의 여학생을 비롯하여 2,106명의 학생들이 자원서에 서명하였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모트와 윌더는 해외선교를 위한 초교파적 협력단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1888년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 자발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으로 명명하고 의장으로 모트(Mott)가 그리고 총무에 윌더가 선임되었다.

 

 SVM은 30년 동안 놀랍게 성장하여 1891년에 오하이오의 클리블랜드(Cleveland)에서 1차 국제 학생 선교사 대회가 SVM의 후원으로 열리게 되었다. 당시 32명의 선교회 대표, 31명의 해외선교사 151개국 선교기관대표인 558명의 학생이 참석하였다. 1945년까지 2만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고 이들중 30%중국으로 20%는 인도로 나갔다. 1910년 영국 에딘버러에서 각국 선교사 대표 1300여명이 모인 국제회의가 열리는 결실을 맺는 등 훗날 교회간의 연합운동의 토양이 될수 있었다. 그러나 1910년을 기점으로 SVM은 극속도로 쇠퇴하게 된다. SVM의 쇠퇴를 두고 많은 학자들은 무엇보다 당시의 세계대전중의 상황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고 있으며, 헌신자들의 학생들의 헌신의 약화가 주는 행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데이빗 하워드(David M. Howard)는 당시 SVM의 약화에 대해서 1차 세계대전 전후로 도시빈민, 노동자문제등 미국내 사회선교의 필요가 보였고, 또 교계가 자유주의 논쟁에 휩싸이면서 SVM운동의 방향성과 관련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게다가 폭발적인 기독학생들의 선교헌신이 조금씩 약화되어 가면서 1890년대 후반 SVM 운동은 차츰 재정적 어려움과 더불어 영적 기운 역시 약화되어져가고 있었다고 하였다.

 

 윌리엄 베흠(William Beahm) 역시 SVM의 약화에 대한 원인을 10가지로 정리하였다. “지도력의 잦은 교체, 재정적인 부족, 비대해진 상부조직, 선교로부터 관심의 이완, 그리고 신자와 비신자간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 사회적 복음” 등이 그것이다.

 

3. 기독학생운동(the Student Christian Movement: SCM)과 캠브리지 기독학생회 (CICCU)

 

 

a. 기독학생운동(the Student Christian Movement: SCM)의 설립배경

 

 이미 앞서 밝혔지만, 1890년대 SVM은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첫째로 미국에서 그리고 영국에서 성장하였다. 이것의 첫 징후는 선언문에 서명한 많은 학생들과 ‘내 진정 소망, 만약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해외 선교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It my Earnest hope, if God permit, to engage in foreign missionary work.')라는 고백와 함께 1889년에 시작된 학생들의 해외선교연합(Students' Foreign Union)이었다.

 

  그러나 운동의 주된 시각은 너무 좁았고 국제적인 기독학생조직은 보다 더 넓으면서 간단한 선교사의 소명을 강조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1893년 케직 (Keswick)에서 열린 여름집회에서 IUCU 즉 국제대학생 연합(Inter-University Christian Union: IUCU)이 시작되었고 SVMU과 공유하였다. 그리고 그 해 새로운 조직은 BCCU (British College Christian Union)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폴필 터너 (Polfill Turner)가 각각 1893년에 SVMU의 총무, 1894년 BCCU의 총무를 맡게 되면서 SVMU와 BCCU가 공동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SVMU와 BCCU의 공통적인 행정관계로 합병을 하게되었고 이로써 새로운 연합이 구성되는데 1905년에 기독학생운동 SCM라는 이름으로 시작하게 된다. SCM은 그 외 다른 신학대학과 연합회를 구성함으로써 영국내에 기독학생운동 연합체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SCM의 등장과 관련하여 로빈 보이드(Robin Boyd)는,

“SCM은 성경과 운동사이에서 드러난 이중적인 관계의식에서 시작되었다. 먼저 마태복음 28:19~20의 ‘가라 그리고 모든 나라로 네 제자를 삼아라’ 하신 지상 대명령(Great Commission)을 따른다. 그리고 운동의 방법론(methodology)은 성경연구와 선교 의무를 수행하는 은혜와 능력을 위한 기도이다."

 

  SCM은 국제적 위치로 성장하게 되었고 1910년에는 폭 넓은 신학을 수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SCM과 CICCU의 분열의 원인이 된다.

 

c. SCM과 CICCU의 분열

 

이미 앞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SCM은 국제적 위치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결과 1910년에는 이미 에큐메니컬적인 운동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그결과 점차 폭넓은 신학을 수용하게 되면서 SCM과 영국내에 분역의 원인이 되었다. 본 장에서 필자는 당시 영국내의 SCM의 분열에 관하여 의견들을 정리하는 것을 통해서 당시의 분위기들을 살펴 보고자 한다. SCM의 분열의 역사는 매우 중요한데 SCM의 분열을 통해서 CICCU가 그리고 IVF가 등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가 데이빗 베빙턴(David Bebbington)은 당시 SCM이 가진 문제는 바로 SCM이 성경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채택한 것이며 분열의 원인으로 논의의 뿌리에는 성경의 지위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2년 동안 기독학생운동(SCM)의 총무를 맡고 있던 티씽톤 태트로우(Tissiongton Tatlow)는 캠브리지로부터 바로 폭넓은 교리적 견해들과 함께 혼합된 고등비평 의견들을 가르치는 강연자들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며 유감을 표하는 내용의 편지들을 받았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받아들인 SCM이 채택한 정책 때문에 그는 아무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올리버 바클레이(Oliver Barclay)와 로버트 혼(Robert Horn)은 당시 학생들간에 있었던 종교적인 갈등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있다.

 

“1844년 YMCA 설립때로 부터 학생들 가운데 있던 우파(Right)는 종교적 정통 교리와 자연과학의 주장과 함께 그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자유주의와의 극심한 지적인 갈등이 생겼다.”

 

 존스토트(John Stott) 역시 금세기 초에 특별히 중요한 두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그중 첫 번째 사건은 CICCU가 SCM으로부터 탈퇴한 사건이다. 스토트는 SCM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음을 피력하고 있으며 이에 CICCU의 행동은 신앙을 지키기 위한 정당하고 옳은 행동이었다며 이렇게 적고 있다.

 

“CICCU 회원들은 그들이 캠브리지의 종교개혁의 위대한 인물들의 전통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긍지와 애정을 가지고 찰스 시므온을 회고했는데,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SCM의 자유주의적인 경향 특히 성경과 십자가 그리고 심지어는 예수의 신성에 대해서도 취약한 교리에 대하여 각성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데이비드 에드워즈(David L. Edeards) 역시 존스토트가 소개한 CICCU와 SCM의 총무단들과의 만남과 대화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SCM의 신앙고백은, 오히려 더욱 기독교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SCM의 중심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1960년에 쓴 글에 의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신 분이 하신 일들 그리고 그분의 죽음으로 요약되어진다.” 이것은 SCM의 중심이며 가장 기독교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로빈 보이드 (Robin Boyd)는 보수적인 CICCU과 SCM과의 분열에 대해서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알리고 있다. 그는 더 보수적인 CICCU(More conservative)라고 언급하면서 보수적인 CICCU의 근본주의적이며 분리주의적인 태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종교적 입장에 대한 근본원칙(Fundamental) 뿐아니라 세부사항에 대한 멤버전체의 의견의 일치는 꽤 오랜기간동안 SCM의 초교파주의와 그것이 자랑스러워하는 전통과 사상을 결합시키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SCM과 CICCU의 분열 그리고 탈퇴의 결과로 SCM이 모든 기독연합을 대표하는 위원회에 의해 캠브리지를 대표하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즉 SCM안에 있는 자유주의는 갑자기 나타난게 아니었으며, 그 운동의 초창기 헨리 더럼몬에 의해 받은 영향은 확실하게 복음주의적이었다. 그들은 성서 비평의 영향에 직면하여서 반항적이거나 보수적이지 않았고 또한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특정한 해석에 대해서도 그렇게 고집적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분열로 인해서 SCM은 캠브리지를 대표하는 연합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어째든 CICCU는 SCM과 WSCF(World Student christian Felloeship)로부터 1910년 3월 분리 되었다. 분열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지만, 이 분열의 중심은 신학적 견해와 성경에 관한 타협할 수 없는 뿌리의 문제였으며, 결국 SCM으로부터 CICCU의 결별은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새 역사를 만들게 되었다.

 이점에 대해 IVF의 초대 총무였던 더글라스 존슨(D. Johnson)의 말에 따르면, “교리의 차이로 인한 당연한 귀결이며 CICCU의 진리앞에서 바른길로의 회복이라고 보았고 역사적으로 CICCU는 1928년 IVF(Inter-Varsity Fellowship)의 탄생이 모체로서 역할을 했다”고 하였다.

 

 

4. I.V.F (Inter-Varsity Fellowship)의 배경.

 

 

a. I.V.F의 배경과 성장

 

 

 전후(戰後)시대의 보수적인 복음주의의 발전의 감추어진 가장 중요한 요인은 IVF였다. IVF는 1920년에 생겨났고 SCM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CICCU의 회원인 학생들에 의해 1928년에 조직화되어 설립되었다.

 이때에 하워드 기니스(H. Guinness)는 의대생으로서 런던의과대학의 기독학생운동(The London Inter-Hospital Christian Union:LIHCH)의 대표를 1926-1928년까지 지냈다. 이때는 막 세워진 영국 IVF가 열릴 무렵이었다. 영국IVF는 하워드 기니스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 파송하여 IVF운동을 개척하도록 하였다. 1929년 캐나다에 IVF를 1936년 트라리에 그리고 같은해 뉴질랜드 IVF를 설립하였다. 미국 IVF의 첫모임은 1938년 미시간에서 개척되었다. 이러는 동안 1930년에 기니스는 호주와 뉴질랜드로 항해하여 그곳에서 학생운동을 일으켰다.

 또한 이 사이에 스칸디나비아, 헝가리, 그리고 스위스에 IVF와 같은 성격의 모임들이 생겼는데, 그 결과 1934년에는 현재의 IFES(The 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s)의 탄생의 기초가 유럽 집회에서 이루어졌다.

 

 IFES의 3대 총무를 지낸 린지 브라운(Lindsay Brown)은 IVF의 업적들에 대해서 SVM과 연결을 시키며 이렇게 이야기 하고있다.

 

“이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였다. 북미 SVM의 진정한 생명력은 이제 미국과 캐나다의 IFES 운동의 목적에 녹아들어가있다. 이 두나라의 IVF는 1947년부터 3년마다 공동으로 거대한 선교대회를 개최해 왔다..... 이 모임을 어바나 샴페인 캠퍼스의 과거의 개최지 이름을 따 ‘어바나’(Urbana) 대회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25,000명의 학생이 몰려온다. 모든 대륙에 흩어진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리스도를 향한 섬김의 소명을 바로 여기에서 받았다.”

 

 

b. IVF의 사역과 열매들 (1930-1945)

 

(1) 선교회: 1933년에 설립되었으며 IVF의 세계선교 센타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특히 1935년 “땅끝까지 복음을”(Evangelical to a Finish) 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307명의 해외선교사를 돕고 있다.

(2) 출판사업: 1928년에 설립되었으며 복음주의 전파와 바른 신앙에 도움을 주고자 설립하였으며 1936년 “in Understanding Be men", 1938년 ”why Believe?"등과 같은 책을 출간했다.

(3) 신학생들 모임(The Theological Students Fellowship: TSF): 자유주의 및 복음에 이탈한 신학사조를 분별하며 복음주의의 학문적인 뒷받침을 위해 설립되었다.

(4)학사회 (the Graduates Fellowship): 1941년 복음사역에 있어 기도와 재정지원, 그리고 직장인 및 군인 등 홀로 사회속에서 신앙의 투쟁을 하는 졸업생을 도우며 사회 실생활에 대한 성경적 입장 연구및 적용을 목적으로 설립되었고 졸업후 사회속에서 더욱 영적으로 성장하는 분명한 복음안에서 자세를 갖도록 돕고 있다.

(5) 틴데일 회(The Tyndale Fellowship): 1941년 IVF의 신학적 질문, 성경적 연구, 도서관 운용등의 역할을 하며 특히 신학 분약에 복음주의적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 연구활동을 하고있다.

 

 

b. IVF의 사역과 열매들 (1946-1978)

 

 홍치모는 1936년-45년 제 2차 세계대전은 여러분야에 충격적이었지만 전쟁후 IVF운동은 영어권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고 보고 있다.

 UCCF의 공식통계에 의하면 기독학생회가 32개 종합대학 50개 단과 대학에서, 54개 종합 대학 500개 단과대학으로 증가했고 순회 간사도 6명에서 41명으로 늘었다. 이점에 대해서 더글라스 존슨은 1950·60년은 IVF가 어떤 장애도 없이 팽창하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몇 가지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첫째는 학생들의 숫적 증가를 든다. 제 3의교육 기관의 증가로 인해 학생들의 숫자가 증가했고 이로 인해 197년에는 UCCF (The Universities and Colleges Christian Fellow )로 고쳐야 했다. 둘째는 각 지역에 복음주의 신자들의 수와 영향력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효과적인 지도체제와 조직의 뒷받침이다. 특히 IVF의 초대 총무 더글라스 존슨은 1924-64년까지 올리버 바클레이는 1965-80년까지 봉사했다. 이들의 봉사는 행정 체계가 안정적으로 잡히도록 도왔을 것이다.”

 

c. IVF의 특징

 지금까지 영국 IVF의 태동을 찰스 시므온으로부터 그리고 캠브리지 7인과 SVM운동, SCM 운동으로부터 정통신학과 성경관을 지키고자 하는 신앙적 투쟁으로부터 살펴보았다. 영국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기도운동과 신앙 부흥운동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캠퍼스에 기도의 운동들과 신앙 부흥운동을 통해서 복음앞에 순종하는 행동으로 나타났으며 하나님의 선교운동에 자원한 그 한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

 둘째는 성경연구와 성경의 정통성을 수호하려는 각성이 있었다. 자유주의적인 분위기와 신학사조, 성경의 비평적인 성장의 분위기 등등에서 학생들은 그들의 교리와 정통 그리고 성경을 지키려는 수호와 각성이 일어났다.

 셋째는 해외선교의 책임이 있었다. 일단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시작은 해외에 대한 선교적인 사명에서 시작되었다. 대학생들의 선교에 대한 헌신과 불붙는 열정은 오늘날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 같다.

 넷째는 사회적 개혁에 관심이 있었다. 특별히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회적 돌봄이 요청되었다. 이에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로잔언약 등등의 대회를 통하여 사회적 개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B. 한국기독학생회(IVF)의 역사

 

 

1. 초기 한국 개신교의 무디의 부흥운동과 학생자발운동(SVM)의 영향

 

 

 SVM과 한국선교 관련을 살펴보기 위해서 이호우는 네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보고 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첫째, 해외선교의 열풍은 북미 대학생들과 신학생들 사이에서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무디의 부흥운동은 해외선교의 열기를 가속시켜주었다. 그리고 그들중에서는 한국 개신교 태동의 길잡이가 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있었다.

 둘째, 1886년 6월 메사추세츠 노스필드의 헐몬산에서 열린 무디의 사경회에서 100명의 학생들이 해 외선교에 자원한 사실은 SVM의 이정표적 사건이었다. 그 100명중에 제임스 게일(J.Gale)과 존 모트는 그이후 한국 선교에 크게 기여하였다.

 셋째 1886년 헐몬산 무디의 집회에서 시작된 SVM은 그이후 한국 개신교 선교에 더욱 큰 공헌을 하였다. 맥코믹을 졸업한 사무엘 마펫과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1862-1931)는 SVM집회에 여러번 참석하여 선교열을 불태웠다. 그리고 이 두사람은 한국 선교를 주도해나가게 된다.

 넷째 미국의 4대 선교부 안에 SVM의 숫자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선교에 미친 그들의 영향력이 매우 지배적이었음을 쉽게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리하면, 초기 내한선교사들은 SVM의 영향을 받았다. SVM 선교사들의 숫자는 내한 선교사들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SVM의 영향을 받아서 교회 설립, 신학교육, 성경번역, 문서선교, 미션스쿨 그리고 순회전도등 한국교회를 위하여 다양한 사역에 앞장섰다. 이호우교수의 말대로, 그들은 한국교회에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앙의 초석을 다져 주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중심적 신앙과 부흥회적 열정의 신앙을 초교파적으로 형성된 한국교회의 전형적인신앙의 유형으로 자리 잡도록 하였다.

 

2. 한국 IVESF의 시작과 배경

 

 

 한국의 기독교는 다수의 SVM 선교사들의 사역에 따라 그 신앙의 성격이 보수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성장했다. 여러 가지 면으로 봤을때 이미 SVM운동은 한국의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기초가 되었음을 알수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기독학생운동인 IVF는 어떤 형태와 모습으로 들어왔는지 살펴보자. 한국 IVF는 좀더 다른 상황으로 설립되고 시작된다. 한국 IVF의 특징을 몇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한국 IVF는 한국전쟁(1945-50)의 발발로 인해 가난과 생존의 문제가 급했던 시기였다.

초기 IVF간사였으며, 1999년 IFES의 대회장으로 지낸바 있던 김영철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한국 기독학생회가 국제기독학생회(IFES)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시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혼돈의 시대였다. 한국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이 우리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러한 불안한 상태는 1945년부터 1955년까지 10여년간 계속되었다. 당시는 정치적인 무질서와 함께 생존의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대학생들에게 복음은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적인 메시지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둘째 어려운 상황속에서 IVF는 학생자발운동에 의해서 태동된것이 아니라. 당시의 지식인들의 각성에 의해서 생겨났다. 한국 학생운동 지도자인 황성수박사와 영국 IVF를 경험한 유학생 이정윤 선생의 소개로 1956년 IFES에 가입하게 된다.

 

“황성수 박사는 당시 기독교 지식인을 대표할만한 인물이었으며, 신학적으로도 든든한 기초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IVF 운동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에도 IVF와 같은 조직을 만들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모임의 명칭도 ”기독학생동지회“라 하였다.

 

  셋째 한국 IVF는 정치와 교회의 분열의 역사 가운데 시작되었다. 자유주의적인 분위기와 WCC운동은 교회연합이라는 이름하에 진보와 보수로 첨예하게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의 기반도 상당히 약했다. 당시 정치도 마찬가지로 분열과 다툼이 계속되는 시기에 시작되었고, 당시의 한국의 기독학생운동은 YMCA와 KNCC가 배경이 되었던 SCM이 주도 하고있었다.

 넷째 한국의 IVF는 교회의 가교역할을 위한 순수 복음주의 학생 선교단체의 성격을 가지고 시작하였다.

 

“조동진목사는 황성수 박사의 기독학생동지회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으나 조동진 목사는 황성수 박사를 중심으로 한 정치 지망생들의 운동체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교회와 대학의 가교역할을 하는 순수 기독학생 운동체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3년 한국복음주의 협의회의 지도로 ”한국대학생 복음연맹“(IVESF)이라는 새로운 명칭의 기독학생 운동 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4년에 IVF의 본고장인 영국에 가서 공부하고 1955년 3월에 귀국한 이정윤선생에 의해 한국 대학생 복음연맹(IVESF)을 IVF의 국제적인 조직체인 국제 기독학생회에 가입하고 이정윤 선생은 한국IVESF의 초대 총무로서 조동진 목사는 학사회(GCF)초대 총무로 IFES총회에 참석하였다.

 

3, 한국 IVF의 성장과 열매

 

 

 (1) 50년대의 IVF는 4.19혁명이후 민주적 제도가 정착되기 전에 5.16군사 쿠데타로 군부의 통치가 있었던 사회적 환경속에서 교회의 기반이 약한 상태였다. 이땅의 교회와 캠퍼스의 신선한 도전이었으며 복음운동의 기초를 다지는데 기여했다.

 (2) 70년대의 IVF는 한국교회의 성장에 따라 제자훈련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IVF는 매일기도운동(Daily Pray Meeting)과 PBS(귀납적 성경연구)를 통해 제자훈련에 구체적으로 기여했다.

박용규교수는 이점에 대해서 1970년대 한국교회 복음주의 발흥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이 선교단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장과 해외 선교의 모체가 되었던 1970년대 대중 전도운동의 산파역할을 했던 것도 이들 초교파 선교단체다. IVF는 복음주의적 이상을 젊은 대학생들에게 심어주었다.”

 

 (3) 80년대의 IVF는 소그룹 캠퍼스 운동이 시작되었고, 대중전도 운동과 로잔대회(1974년 1차, 1986년 2차)의 영향을 통해 기독교 지성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시기였다. IVP를 통해서 기독교 세계관 서적과 성경공부 교재를 출판하여 보급하였다. 이시기에 IVF운동이 확산되었다.

 (4) 90년대 그리고 현재의 IVF는 IVF 운동의 3대 요소인 전도, 제자도, 선교의 균형있는 발전이 강조되었다. 한편 군부의 독재정권아래에서 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민주화 투쟁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였다. 이때에 한국 IVF는 사회적 책임의 정신에 따라 한국사회문제를 감당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결국 1987년 6.10 민주항쟁 이후 사회 참여에 대한 견해차이로 갈등이 생겨났고 1991년 5월 분신 정국 이후에 공동체 내에서 극명하게 표출된 것이 소위 ‘서울지역 6개대 사태’라는 가슴아픈 상처를 지니게 된다.

 현재 한국 IVF는 캠퍼스 복음화와 기성사회 복음화를 목적으로 하며 인격적 복음전도, 삶의 전영역에 걸처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기 그리고 세계를 품은그리스도인이 되라는 전도(Evangelism), 제자도(Discipleship), 선교(Mission)의 세 전략을 가지고 사역하고 있다.

 1999년 한국 IVF는 IFES 세계 총회를 개최하였고 몽골을 비롯한 몇몇 미개척국가에서 IFES를 개척하는 역할를 감당했다. 현재 전국 150여개 캠퍼스에서 7,000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홛동하는 복음주의 학생운동으로 성장했다. IVF의 김중안 대표는 2006년 50주년 대회를 통해 50년 전 한두 사람의 꿈과 헌신으로 시작한 학생회가 인재양성의 산실, 복음화를 꿈꾸는 공동체로 성장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새로운 50년을 향한 비전인 ‘캠퍼스와 세상 속의 하나님 나라운동’을 선포했다.

 

 

Ⅳ 맺는 말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몇가지 정리를 할수 있다.

 첫째 복음주의 학생운동(IVF)는 학생들의 신앙 부흥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SVM의 영향을 받았으며, 무디의 부흥주의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한국에 부흥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둘째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학생 자발운동이었다. 찰스 시므온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은 CICCU로 캠브리지 7인의 헌신은 SVM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IVF가 들어왔을 당시에는 한국적인 상황 즉 6.25전쟁의 전후에 불안한 현실속에 학생들의 자발운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셋째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해외선교를 위한 선교운동이었다. 모든 학생선교단체의 중심에는 해외선교를 향한 도전으로 시작되었다. 그중 존 모트나 윌더의 헌신적인 사역을 통해서 그리고 무디의 헐몬산 집회가운데 헌신을 서약한 100명중에 한국 선교사가 나왔다. 한국IVF는 선교적 운동으로 시작되었다기 보다 6.25전후 그리고 군사독재시절을 거치면서 해외선교중심이기 보다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각성이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48년부터 3년간 하는 미국의 어바나(Urbana)대회를 모델로 하는 선교한국 대회등이 시작하면서 선교운동이 집중화 될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IVF는 전도 선교 제자도의 세전략을 가지고 선교에 주력하고 있다.

 넷째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교회의 연합을 위한 운동이었다. SCM의 표어는 'Church ahead of the Church' 였다. 각 시기의 대학생 선교운동은 교회와 밀접히 관련이 있었다. 한국교회의 상황은 80년대 이후 선교단체의 훈련받은 학생들이 이제 교계의 지도자들이 되면서 교회의 성장에 큰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와 대학생 선교운동과의 연합은 한국교회의 풀어야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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