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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길선주목사와 1907년의 평양 대 부흥운동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1.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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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부흥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흥'은 '성장'이라는 이름아래 그 원래의 의미들을 잃어버리게 하고 있는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교회에 보화와 같은 순간들이 있다면, 1907년의 대부흥운동 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과제물로 준비한 글이지만, 게다가 허호익교수의 책인 "길선주 목사의 목회와 신학상"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쓴 모자이크(?)와 같은 글이지만, 이 작은 연구를 통해서 위대한 신앙의 선배이자 스승인 길선주 목사의 나라사랑, 교회사랑의 뜨거움을 느껴보고자 한다.
지면과, 기술적 문제로인해^^;; 각주는 생략한다.


길선주목사와 1907년의 평양 대 부흥운동

   

 Ⅰ 서론


 

1. 연구 동기 및 목적

 

최근들어 한국교회는 ‘부흥’에 관심이 많아 지고 있다. 그러나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이 주는 부흥의 의의는 1960년대 이후로 ‘교회성장학’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져 그 찬란한 빛을 잃어가고 있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오늘날에 이르러 ‘부흥’이라는 말은 교회의 재정이 늘어나고 건축하고 사람의 숫자가 불어나는 것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고 있다. 게다가 신앙의 선배들에게 물려받은 사경회, 새벽기도운동, 통성기도, 전도운동등이 신비주의, 개교회주의, 성장주의, 기복주의, 개인구원중심주의 등등의 잘못된 모습으로 변질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21세기에 들어서 침체의 국면에 접어들었고, 한국교회안에 문제 해결과 쇄신의 소리들이 커지고 있는 실정에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길선주의 신학사상을 재고해 본다는 것은 그자체가 영광스럽고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2. 범위와 전개방법

 

 무엇보다 본 소논문의 핵심인 1907년 부흥의 주역으로서 길선주 목사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할것이고, 1907년 부흥의 어원적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즉 성도의 영적인 회심과 회개운동인 영적 대각성(Great Awakening) 으로 봐야할것인가? 개종과 전도를 중심으로 한 대부흥(Great Revival)로 볼것인가? 혹은 1907년의 부흥이 세계사적인 부흥과 얼마나 비슷하며 영향을 받았는가? 아니면 고유의 토착적인 형태였는가? 또한 부흥의 주역으로 길선주 목사의 신학사상이 1907년 부흥운동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통해서 길선주 목사의 나라사랑과 교회사랑의 의의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바람직한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에 관하여 생각해보고 결론을 맺고자 한다.

 

 

Ⅱ길선주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1. 길선주 목사의 생애 : 선도적 배경


 길선주
(吉善宙)목사는 성균관 박사 길재(吉再)19대 손으로 1869315일 평남 안주군 성내 후장동에서 길봉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길선주는 네 살 때부터 가정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일곱 살 되던해에 당시 이름 높은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한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는 열 세 살때에 안주 본부 초인직에 근무했었다. 그는 열 다섯 살까지 본부 초인직에 충실했고 188212월에 초인직을 사면하고 열 여섯살에 노강 첨사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서 그곳 상서호(上西湖) 사숙(私塾)에서 장선생에게 한학을 계속 수학하였다.

  그러나 당시 길선주는 그 시대의 불공평한 관행과 사업의 실패 깡패에게 맞아 약해진 그의 몸이 중병으로 거의 재기불능에까지 이르는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통한 시대적 혼란 등을 경험하면서 그는 점차적으로 이 세상의 허무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었고 이러한 염세적인 사상은 그를 영적인 세계를 갈구하게 하는 동기를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길선주는 그의 나이 열 아홉 살 되던해 여름에 처음으로 관성교 (關聖敎: 삼국지의 관우를 높이는 종교)에 심취하여 그 종교의 보고문(譜告文)을 만번이나 읽었다. 열 아홉 살때 관성교의 보고문을 만독함으로 그의 도행을 시작한 길선주는 관성교를 접한지 얼마되지 않아 이미 영적체험을 하게 되었으며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보다 깊고 심원한 종교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하여 선도(仙道)의 종교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는 이 선도에서도 엄청난 정성을 기울였기에 이미 스물 세 살대 신차력(神借力), 수차력(水借力), 약차력(藥借力) 등에 통달하여 초인적인 힘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이제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25세 되던 해, 불도를 닦기 위해평양 대성산 두타사와 평남 순천군에 있는 안국사를 찾아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3년을 지냈으나 아무 희망도 찾지 못하여 실망을 안은채 좌절했었고 또 그후 도교에 의지를 하면서 신선이 되기 위한 약초를 연구하기도 했지만 그의 건강만 악화되는 결과만 낳았다. 많은 종교와 도의 성취를 위한 그의 노력은 항상 허무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2. 기독교 입신에서 1907년 대부흥 전까지

 
  그 무렵 길선주에 중대한 변화를 주는 변화를 주는 주가지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마펫(S. A. Moffett 馬布三悅)과의 만남을 통해 기독교와 만남이었고 청일전쟁의 난리였다.

그 무렵 마펫은 평양을 선교기지로 삼고 1893년 2월부터 상주하며 조사 한석진을 데리고 전도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공개적인 출현은 길선주에게 새로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마펫을 찾아가 기독교에 대한 교리와 예수의 복음에 대하여 담론을 벌이고 토론을 하였다. 이것이 길선주와 기독교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 길선주는 1893년 친구인 문홍준을 마펫과 한석진에게 소개하였고 또한 같이 도를 연마하던 김종섭을 소개하여 기독교에 대하여 알아보게 하였다.

  게다가 당시 1894년~95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을 통해서 평양의 주민들은 극심한 피해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당시 길선주는 도탄에 빠진 민중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들을 위해서 어떤 일도 할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다.

  길선주는 이러한 도탄과 실망가운데 전해 읽은 「천로역정」이라는 작품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특히 김종섭의 끈질긴 전도와 설득으로 마침내 예수교가 참 도리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중생을 체험 하게 되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스물 여덟 살인 1896년 가을이었다. 길선주는 개심하던 해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영수직을 받고 33세 되는 해에 장로로 선출이 되었다.

 이듬해인 1897815일 길선주는 널다리골 (판동) 교회에서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으로 입교하게 되었다.

  1898년 길선주는 널다리골 교회 영수에 피택이 되었으며 그의 부모가 세례를 받았고 사업도 성공했다. 그는 예수학당 이라는 학교를 차리고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숭덕과 승형학교의 효시가 된다. 그는 학회장으로 10년 동안 교육사업의 전책임을 졌다. 그는 1903년에 자신의 약국사업을 정리하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05년 박치록(朴致錄)장로와 함께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면서 영적부흥의 기틀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7년에 평양 신학교를 제 1회로 졸업하였다.

 

3. 1907년 대 부흥운동 때부터 임종 때까지


  1905
년 을사조약이 있은 뒤에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의 부흥운동 소식과 1906년 원산지역 부흥의 주역인 하디(R. A. Hardie)목사가 평양에서 가진 부흥회에 힘입어 1907년에 길선주는 대부흥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때부터 그는 한국교회의 부흥사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부흥의 열기 속에서 장로회신학교는 1907610일에 길선주를 포함한 제1회 졸업생을 7명 졸업시켰다.

  그해 917일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는 목사안수를 받고 그날로 교회의 청빙에 의하여 길선주는 장대현 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었다. 그 뒤로 그는 20년 동안 그곳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다. 1910년에 길선주 목사는 제 4회 노회에서 부회장에 당선되고 백반구령운동 을 제안하며 실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05인 사건으로 그는 맏아들 진형(鎭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으며 1919년 33인에 포함된 길선주는 장로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이일로 옥고를 치르는데 여기서 그는 계시록을 만번이나 독파했다고 한다. 192010월 출옥된 뒤에 1926년 박윤근과 그 일파들이 조직한 유지회 에서 길선주 목사와 그 당회를 배척하는 교회의 분규를 당하기도 했다. 결국 길선주 목사는 그를 따르는 500여명의 성도들과 함께 이향리 교회를 창립하여 그곳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길선주 목사는 19351125일 평서노회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에 마지막 설교를 마친 후 강대 위에서 졸도한 지 하루만인 26일에 하늘나라로 갔다. 결국 그는 193511월 그는 생애를 마감했다.

 

4. 그의 저술 활동


1) 해타론


  길선주의「해타론」은 홍정후(洪正厚)의 칠득(七得, 1895년), 노병선(盧炳善)의 파혹진션론(破惑進善論,1897년), 최병헌의 예수텬주양교변론(耶蘇天主兩敎辯論, 1909년)과 더불어 선교사들이 저술하거나 외국어로 된 책의 번역이 아니라 순수 한국 기독교인의 저작으로 밝혀진 한국인의 신앙고백을 담은 대표적인 저서중의 하나이다.

「해타론」은 1901년 5월에 서술하고 1904년 출판된 소설식 전도문서로서 모두 17면으로 된 것인데, 길선주가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중 저술한 것이다.

「해타론」의 내용은 사람이 소원성(所願城), 성취국(成就國), 영생국(永生國)에 이르기까지 사로(思路), 음란로(淫亂路), 취주로(醉酒路0, 연락로(演落路), 급심로(急心路), 자만로(自慢路), 이심로(二心路), 정의문(定意門), 모안로(謨安路) 와 무기천(無氣天), 망리수(忘理樹), 다수산(多睡山), 고난산(苦難山), 휴식정(休息亭)등을 거쳐 가야하는데 이 길목에는 해타란 짐승이 도사리고 있어 사람을 잡아먹어 게으름에 빠져 소원을 성취하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마지막장은 성취국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사적을 기술하면서 타종교의 성현들(동양의 동중서, 광형, 주매신, 공자가 서양의 이세택이 예수 바울과 동등한 성현으로 위치하고 있다)도 언급해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넷적 동양에 잇던 지혜 잇는 사람이 말하기를 한결갓치 부즈런한 사람에게는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업다 하엿스니 일로 볼진대 만사를 성취하는 거슨 부즈런한 대 잇고 천가지에 해로운 거슨 게으른 대 있는지라.”

“해타 즘생의 해를 피하고 고난산(苦難山)을 지나 성취국(成就國)으로 드러간 사람의 사적을 대강 말하노니 동양에 동중서(董中舒)는 가난하야 종용이 글공부할 방이 업는 고로....... 서국에 이셰택은 우물방틀 돌이 드레줄에 달어 깊이 패임을 보고 부지런함을 깨다러..... 주매신(朱賣臣)은 곡식 멍석이 비에 뜨는 거슬 깨닫지 못하도록 공부하여 벼슬을 하엿고 십이 성도의 바울도 아라배에 가서 항상 기도를 부즈런히 하엿고 예수계서는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날밤에 산에가서 기도하시고.... 이모든 이의 사적은 성취국으로 드러간 사적이라”


  이 「해타론」은 1912년 만성취(萬事成就)란 제목으로 52쪽 보완 확대하여 출판되었고 그 후에 그의 유명한 「말세학(末世學)」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이러한 길선주의 초기 신앙은 한국 전토 신앙 및 사상에 대한 기독교적 평가와 해석에 근거한 토착적 민족 기독교를 수립하는데 초점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다시말해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 민족의 결정적 단점으로 지적하는 것 하나가 바로 게으름과 나태였다. 길선주 목사는 이 게으름이야말로 우리 민족을 파멸시키는 근본적 요인이라 생각하고 이를 척결하고 계몽하기위해 「해타론」을 써서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2) 말세학


 계시록이 요한믁시 라는 이름으로 처음 번역 발행되었을 때는 1900년이었고, 그 번역은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늦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나마 아직 시험역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길선주가 1903년부터 1907년까지의 신학 수업에서 계시록을 제대로 배웠으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1916년 이전에 1년의 3개월씩 5년 과저을 시행한 대한 장로회 신학교(평양신학교)의 교과목에는 4학년 1학기에 게일 선교사의 ‘종말론’강의가 포함되어 있다.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신학교 교수 중에 길선주와 친했던 마펫 선교사는 온건하고도 비교리적 전천년주의자였으며", 자신의 종말론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수강은 길선주가 대한장로회 신학교(1903-1907) 재학중 소안론(W. L. Swallen)의 ‘계시록’이라는 과목을 수강한 것으로 추정한다. 소안론 선교사는 20년대 이 후에 문서활동으로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열심히 유포시켰던 인물이었다. 이를통해 길선주 목사가 이들의 종말론을 배경으로 하여 자신의 말세학을 전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30년대 중반에 와서 길선주 목사는 말세신앙을 ‘말세학’이란 독창적인 체계로 더욱 발전시켜 그의 생전인 1935년 7월부터 시작하여 그의 별세 (1935. 12. 26) 항 후인 1936년 11월까지 14번에 걸쳐 「신앙생활」에 연재하였다.

 길선주 목사의 말세학의 기본구조는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한 세대주의적 천년왕국 전 천년설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 그러나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세상을 대속하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셔서 하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시다가 공중 혼인 연석에 강림하시어 성도들을 데려가신 뒤에 칠년 환난 끝에 다시 지상에 재림하셔서 천년세계를 건설하시고 새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다시 크고 흰 보좌로 강림하시어 세계를 심판하시고 무궁 안식 세계를 건설하셨던 그 본위대로 에덴 낙원을 회복하실 것이다.......(중략)”

 

  1936년도 신앙세계에 발표한 길선주의 ‘말세학’ 초본 (신앙생활 1936년 1월호)을 보지않고 길진경이 편집 수정한 말세학(영계 길선주 목사 유고 선집,1968년)을 본 유동식, 송길섭 등에 의해 길선주 목사의 1974년 말세설이 유포된 것이다.

당시 길선주의 말세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와 긍정적인 평가가 엊갈리고 있다. 그가 말세론에 치중하여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말세의 시기를 상정하는 등 시한부 종말론의 경향을 드러내 보였으나 1920-30년대의 길선주 중심의 말세운동은 이러한 사회일탈적인 결과만 촉진시킨 요인으로 된 것만은 아니며 기독교의 순수성을 지키고 일제와 대결할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한 긍정적인 면이 컸다고 볼수 있다.

 
Ⅲ. 길선주의 1907년 대부흥 운동의 특징과 그의 사상

 

1. 1907년 대부흥운동의 정의문제.


 20세기 초 한국교회는 몇 년에 걸쳐 연속적으로 일어났던 부흥현상을 “대부흥”, “대부흥운동”,“대각성”, “대각성운동”등으로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각각 "대부흥"은 영어의 “the Great Revival". ”대각성“은 “the Great Awakening"을 번역한 것이다.


  1907년 부흥운동의 역사적인 고찰과 그 특징을 살펴보기 전에 한번쯤 집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정의의 문제
이다. 예를 들면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영적인 운동을 “각성운동”이라고 불러야 할지, “부흥운동”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두 표현이 모두 가능한지 집중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다.


   먼저 1907년 그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선교사들의 평가도 대부흥과 대각성으로 서로 상이하다. 블레어(w. Blair)는 이사건은 ‘한국의 오순절’(The Korean Pentecost)라고 규정하였다.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서 평양부흥을 ‘진정한 오순절성령사건agenuine Pentecost)’이었음을 지적했다. 반면에 감리교회의 존스(George H. Jones)와 노블(W. A. Noble) 선교사는 “한국 부흥운동”(The Korean Revival)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페리 (Jean Perry)등은 “신앙적 각성”(The religious Awakening)으로 평가하였다.


  먼저 1907년을 부흥운동으로 본입장들이다. 백낙준, 김양선, 민경배, 박용규, 류대영등으로 이어지는 입장인데, 어원과 관련된 입장은 류대영은 19세기 서부 개척지를 배경으로 회개, 개종, 성령체험이 일어나는 것을 부흥으로 보며, 부흥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정기간 동안에 거쳐서 연속적으로 발생했다면 그것을 부흥운동으로 부를수 있다고 할수 있으며 폭발적으로 일어났으면 ‘대부흥’이라고 할수 있다고 하였고 반면에 대각성이란 대부흥의 결과로 종교적 사회적 현상을 전체적으로 말하는 용어로 부흥현상이 주기적으로 나타났을 때 사용하는 단어라고 주장한다.


  그들 중 류대영교수는 전후관계만을 따져서 1907년의 일어난 사건을 따져서 말할때는 ‘1907년 부흥운동’이라고 함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제시한다.
대체로 이들의 공통적인 입장은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신앙 성격이 형성되었고 신앙체험과 영적생활이 깊어졌다고 보는 견해들이다.


  반면에 ‘부흥운동’이 가져다 준 피안동경적이며 비정치화된 경건주의적인 면을 비판하여 반성하는 뜻에서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는 운동’ 곧 ‘신앙각성운동’이란 용어를 써야 타당하다고 본 입장들이 있다. 김경재는 부흥운동이란 어휘 자체가 교세의 폭발적 성장을 우선적인 목적인양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 이를 반성하는 뜻에서 ‘1907년 한국 성결운동’ 혹은 ‘1907년 한국교회 대 각성운동’이란 용어를 쓸 것을 주장하며 이 용어들이 역사적 사실에 더 적합하다고 하였다.

  필자는 1907년 사건은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 세계부흥운동의 성격이 그대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1907년의 사건을 ‘부흥운동’이라 함은 18세기 당시 영국의 복음주의자들로부터 내려온 형태이며 존 웨슬레와 조지 휫필드를 중심으로 한 영국의 부흥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개종을 목표 로한 ‘복음전도’와 관련이 있다. 1907년 신앙운동은 이 후에 사경회와 백만인구령운동으로 뿌리내려지며 한국교회는 전도의 열매들을 맛본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때 개종을 목적으로한 “부흥운동”이라고 충분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1907년 신앙운동 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신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개종(conversion)이 아니라 지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더욱 헌신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성화(sancification)의 경험이었음을 보여준다 즉 당시 1907년 신앙운동은 개종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한 부흥집회가 아니라 이미 성도가 된 사람들의 죄에 대한 각성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1907년을 대각성이라함도 옳다.


  이에 필자는 두 주장을 종합한 의견을 피력하는 바이며 이 의견은 아래에 제시한 이만열의 의견과 같다.

“1907년 1월에 일어난 평양의 대 부흥운동은 회개 중심의 대각성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연구자들의 대부분은 회개를 강조하면서도 이 부흥운동 기간 동안에 교인들의 증가를 증언하고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좀더 정밀한 고찰이 필요할것으로 보이지만, 지금까지 평가로 본다면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양자를 겸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더 강조하자면, 필자의 의견은 당시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 세계의 부흥운동이 그대로 한국교회 안에 전도와 각성이 어울어저셔 토착적으로 뿌리내리게 되었다는 통합적의견이다. 당시 세계의 부흥운동은 1907년과 놀랍도록 유사점이 보인다. 김인수에 의하면 개인과 사회의 회개와 도덕성이 회복되고 둘째 교회의 성장과 교육기관이 증가되고 셋째 전도와 선교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며 넷째 여성등 인권신장운동이 일어나고 다섯째 연합 및 애국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2. 1907년 대부흥운동의 특징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 한국교회의 특징적인 토착화가 일어난다. 사경회, 새벽기도운동, 백만구령운동, 통성기도, 날 연보 등등의 신앙유형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서 뿌리를 내렸다. 그러므로 1907년의 부흥운동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향하는 바 내새적이고 기복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와 교인의 도덕성 향상뿐 아니라 근대적 사회 계몽운동에 부흥운동이 기여하였다고 볼수 있다.

 

3.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전개 ‘길선주를 중심으로’


 바로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의 중심에 바로 길선주가 있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회의 강사중 한사람이며 산정현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편하설 선교사는 “1907년 대 부흥운동은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되었고 길선주의 가르침과 설교는 그 부흥운동의 중요한 특징이었으며 그는 곧 ”전국의 여러 곳에 초청을 받아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저변 확대시키는 일에 가장 광범위하게 쓰임받은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1) 1907년 평양대부흥회의 배경


 1903년 원산에서 모인 선교사 집회에서 하디(R.A Hardi) 선교사의 회개가 바로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첫 봉화가 된 것이다. 1907년 정월 대부흥이 일어났던 사경회에서도 한사람이 일어나 회개 할 때 도미노현상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차례로 일어나 회개하기 시작하면서 대부흥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들이 지은 죄악, 즉 도둑질, 간음, 불효, 이웃에 대한 증오와 모함 심지어 살인한 죄까지 적나라하게 회개하였다.

이렇듯 1907년 평양 대부흥은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외적 역사적 요인과 내적 종교적 요인이 있을수 있다. 이미 1907년 대부흥은 1903년 하디선교사의 성경공부중에 일어난 회개의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디 선교의 고백이 원산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성경공부와 새벽기도운동의 영적 배경이 1907년 평양 대부흥의 내적 종교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씨앗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전개


 1907년 당시 저녁집회는 1월 6일부터 15일까지 저녁 7시에 시작하였다. 6-11일, 15일 강사는 길선주 장로이고 그 외에 리, 블레어, 베어드, 헌트가 설교하였는데, 주강사는 길선주라 할 수 있다.
1907년 1월 14일 저녁집회에 이상한 분위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집회후 500여명이상이 남아서 새벽까지 죄를 자복하고 통곡하며 용서를 구했는데 이길함목사는 ‘그때 제가 이제까지 본적이 없었던 종류의 집회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1월 15일 저녁집회에 길선주 장로의 회개의 기도가 온 청중 가운데 죄에 대한 참회가 일어났다고 한다.

 

“저는 아간과 같은 사람입니다. 저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약 1년 전에 내 친구 중 하나가 임종을 앞두고 저를 집으로 불러 말했습니다. ‘길장로 나는 이제 곧 죽을 몸이야. 자네가 내일을 맡아 주게. 내 재산을 관리해 주면 좋겠네....... 그후 저는 그의 부인의 재산을 관리했지만, 부인의 돈 100달러를 빼돌려 내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가로막았습니다. 내일 아침 100달러를 그 부인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이날 길장로가 성령의 불길에 사로잡혀 큰 위엄과 능력으로 통회와 자복의 회개를 외쳤다. 길선주의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회개하며 자복하고 마룻바닥에 얼굴을 가리우며 두려워하였다. 현장의 목격자였던 게일은 말씀을 증거하는 길선주 장로의 순수하고 성스러운 모습이 마치 예수와 같았다고 한다.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는 순식간에 평양전역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평양 시내의 선교 학교로 번져갔다. 그리고 길선주는 대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전국으로 순회하면서 사경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Ⅳ. 길선주와 1907년 대부흥운동의 영향과 토착화

 

지금까지 우리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가지는 어원적 문제로부터 1907년 부흥운동의 전개를 살펴보았다. 이미 필자가 밝힌대로, 1907년 부흥운동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통해 단시일내에 서양기독교를 우리의 종교로 한국인들의 심성과 공동체에 뿌리내리게 했다는 데 가장 큰 특징과 공헌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할수 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특징을 세가지로 정리해 보면, 먼저 영적 도덕적 신앙 각성운동이었다. 둘째로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의 구국기도운동이었다. 셋째로 사경회와 백만인구령운동으로 이어지는 전도사업 운동이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에 미친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의 구체적인 영향을 연구해보도록 한다.

 

1. 사경회


 길선주는 1907년 대부흥운동 이후로 가장 유명하고 인기있는 사경회 강사였다. 그래서 전국을 순회하며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장대현교회는 수시로 평양 교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사경회를 열었다. 이리하여 장대현 교회는 평양의 다른 교회들의 모범이었고, 이 교회를 중심으로 평양의 여러교회들이 유기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사경회를 통해서 문맹을 타파하고 시국인식을 깨우치는 계몽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박용규는 이러한 사경회가 체계적인 성경공부, 전도, 기도 집회를 통해 기성신자에게 영적충전과 교회의 부흥을 촉발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정리하였다.

길선주목사의 사경회의 영향을 정리하면, 첫째 한글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는 한글 보급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둘째 교육적 기능이 확산되어 기독교학교와 학생수가 늘어났다. 셋째 근대 사회 윤리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흥운동을 통해서 반상제도 철폐, 여성평등 실현, 주술행위 타파등의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였다.

 

2. 철저한 통회,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사경회는 언제나 성경공부와 함께 집중적인 기도를 병행하였다.
길선주가 주도하여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전국적으로 파급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도교를 비롯한 한국의 재래종교에도 수행되는 기도에 토착화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옥성득은 개신교의 새벽기도는 위기에 처한 교회와 민족공동체를 위한 공공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 전통 종교의 사적기도와 전적으로 다른 특징을 지닌다고 하였다.

초기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집회를 앞둔 기도, 한국인의 새벽기도, 철야기도, 위국기도회 등으로 많은 기도 집회를 가졌다. 이 회개운동의 특징은 철저한 통회의 통성기도와 공개적인 죄의 고백과 자발적인 보상등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통성기도는 선교사들의 예상과는 달리 돌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정치적으로 ‘나라 잃은 절박한 상황’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도움을 받을 곳이 없는 어려운 현실이었기에 이들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앞에 체면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내던질수 있었던 것이다“


3. ‘날 연보’ 와 전도 및 백만인구령운동


 부흥을 통해서 무엇보다 성도들은 죄로 부터의 깊은 해방과 복음의 진수를 맛보았을 것이다. 이는 복음전도의 가속화로 나타나게 된다. 부흥회를 통하여 회개하고 죄사함 받은 구원의 체험의 감격을 맛본 신자들은 그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들이 발견한 복음을 전하기 위하 자연스러운 결과가 ‘날 연보’제도로 이어졌다. 부흥회 마지막날에 참석자들의 복음을 전하는데 시간을 드리겠다는 전도서약이다.

약 3개월 동안 평안북도 전지역에서 3,000일 정도의 자비량 전도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1907년 대부흥운동을 통해 확산된 ‘날 연보’의 전도 열정은 곧 ‘백만인구령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이 운동은 길선주가 1908년 압록강 연안 순회집회를 마치고 평양에 돌아오면서 구체화되었다.

 

4. 나라사랑과 말세사상


 길선주 목사는 대부흥운동 기간 전후의 그의 삶의 여정을 보면 길선주에게는 위국 기도를 통한 국권회복의 강한 소망이 있었으며 그에게 있어서는 나라사랑과 주님 사랑이 분리될수 없었음을 확인할수 있다. 그러므로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대부흥운동 참가자들의 온건한 ‘위국기도’나 ‘독림계몽’ 노선도 정교분리의 비정치화로 기울어졌다고 매도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는 의병운동이 구국의 해답이라고 여기지 않고 평화주의적인 위국기도회를 시작하는데 한국교회 전체를 향하여 나라를 위한 기도가 불일 듯 일어나기 시작하고. 그해 11월 을사늑약이 발표되지자 상동교회에서 수천명이 모여 연일 기도회를 가졌다. 그는 독립청원의 뜻으로 3.1 독립선언서에 인장을 맡겨 서명했으나, 부흥회를 인도하느라 3.1 선언식에 참여하지 않고 동지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진 출두하여 1년간 8개월간 미결수로 재판을 받고 무죄석방된일이 있었으며, 장남 길진형이 105인 사건으로 인해 심한 고문뒤에 1918년에 죽게 된다. 그 이후에 그의 사상은 변화된다. 길선주가 대부분이 1920년 이후에 시한부 종말론에 빠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종말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이땅에 이루어질 평화와 자유의 세계인 ‘말세삼계설’을 가르쳤다.

길선주 목사는 우리가 모두 애국심과 애주심으로 함께 달려갈 때 또한 모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므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구원하고 국권을 회복시켜 주실것으로 믿었다.

 

Ⅴ. 결론

 

3년전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100년째 되는 날로 ‘2007 부흥 Again’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1907년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여전히 한국교회는 사회로부터 격리와 소통의 부재의 과제를 안고 있다. 1907년 평양대부흥과 길선주 목사를 통해서 진정으로 나라사랑, 교회사랑의 실천적 의의를 살펴볼수가 있었다.


본 소논문을 정리하면,

먼저 1907년 대부흥운동의 정의의 문제는 회개와 영적 대각성이 중심이된 대각성과 개종과 전도가 중심이 된 부흥운동으로 정리해 볼수 있으며 1907년의 부흥운동은 두가지 모든 성격을 하나로 정의할수 있는 통합적인 운동으로 볼 수 있다.

둘째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내새적이며, 피안적인 형태의 영적각성운동이기 보다 개인과 사회의 회개와 도덕성이 회복되고, 교회의 성장과 교육기관이 증가되고, 전도와 선교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며, 여성등 인권신장운동이 일어나고 다섯째 연합 및 애국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셋째 길선주의 신학사상은 1907년 부흥운동에 영향을 크게 주었고 특별히 한국 교회내에 기독교 토착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사경회, 새벽 및 통성기도, 전도운동, 말세사상과 구국기도회로 뿌리내리게 된다.


이제 다음 몇 가지의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한국교회에 주는 방향을 제시하고 본 소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 ‘부흥’의 정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관한 것이다. 교회성장, 개교회주의가 주는 부흥이라는 단어는 건축과 재, 성도의 숫자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1907년의 부흥의 의미는 대각성과 회심으로 인한 소생의 의미가 있다.

둘째 바람직한 한국교회 영성의 신학의 방향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영적 개인주의, 기복신앙, 내새중심의 신앙관이 자리잡고 있다. 1907년의 부흥운동과 길선주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기독교 영성은 현실피안적이지 않고 개혁적이며, 공동체적이라는 것이다.

셋째 나라사랑에 관한 것이다. 길선주와 1907년 부흥운동은 나라를 잃은 서러움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들은 온전히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나라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 같다. 세상과 소통의 부재, 고립, 소외당하는 자들에 대한 무관심이 오늘날 큰 문제점으로 다가오고 있다.

넷째 교회사랑에 관한 것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을 통해 구원의 감격과 회개와 치유의 기쁨은 ‘날연보’와 전도운동으로 이어졌다. 영혼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 교회사랑과 연결된다. 그들의 헌신과 열정을 통해서 오늘날 침체된 한국교회를 깨우길 원한다.

그러므로 본 소논문을 마치면서 필자는 오늘날 한국교회는 온전한 부흥의 회복의 필요성과, 믿음의 신앙선배들의 아름다운 유업의 진정성을 회복하고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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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평양대부흥운동」.서울: 생명의말씀사,2005,17-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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